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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겁을 먹을 필요는 없는데도

태풍이 동반하는 두려움의 실체들-바람,구름, 파도, 어두움, 그리고..

by 전희태


2(8580)1.jpg 약간의 황천을 만났을 때,파도가 갑판 위로 올라와 부서져 내리는 모습.


북서쪽으로 잘 빠져간다고 여긴 BILIS란 이름을 가지게 된 태풍이 7노트로 떨어진 속력으로 이번에는 계속 서쪽으로 가고 있다는 기상 통보를 다시 받아 보고 있다.


그 시간 움직임들의 위치가 우리 배와는 얼마나 떨어져 있나 살펴보니, 서쪽으로 420 마일 벌어져 있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 정도라면 한시름 놓이게는 하지만, 계속 떨어지는 태풍의 진행 속력이 슬슬 세력을 키우기 위해 머뭇거리려는 상황이란 걸 짐작하게 되니까, 다음 움직임을 판단함에 까다로움까지 함께 넘겨받는다.


혹시 빨리 커지고 빨리 움직이기라도 해서 진행 방향을 우리가 올라가는 쪽으로 틀어지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까지 나서게 되니 입맛까지 다셔가며 애를 태울 수밖에 없는 거다.

전에 타던 배들 마냥 최소한 13-4 노트 이상 나는 속력이라도 가졌다면, 그나마 어찌 태풍을 미리 피해 도망가는 흉내라도 낼 수 있으니 크게 걱정하지 않을 성싶다는 얄팍한 마음마저 앞세워 본다.


가진 속력이 겨우 10 노트에 앞바람이 조금이라도 불면 즉시 1-2노트의 속력쯤은 쉽게 뭉개져 버리는 현재 본선의 입장에서는 태풍이 맹렬한 속력으로 달려들 경우 꼼짝없이 당해야 한다는 두려움은 항시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기우성의 걱정이라며,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한다고 느끼고 있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불안으로 어려워하는 형편 , 이것이 황천의 바다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선원들의 생생한 모습이다.


이렇게 미리 겁을 먹으며 걱정을 사서 할 필요가 없다고 우겨보면서도, 태풍의 태자 이야기만 나와도 초조해지고 걱정의 늪에 빠져드는 나 자신의 소심함이 그저 답답할 뿐이다.


내일 정오 위치를 낼 때까지는 태풍이 설사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있다 해도, 아직까지는 벌어져 있는 거리가 420 마일은 되니, 그때까지는 안전하다는 확신을 곱씹듯이 되뇌며 스스로를 겨우 달래 놓는다.


저녁 일곱 시로 들어서는 시침에 등을 돌리며 브리지를 내려오는 데, 여름의 깊어진 끝자락에 와 있는 때문인가 어느새 바깥은 깜깜한 어둠 속에 묻혀 가며 새롭게 두려움을 덧칠해주고 있다.


저녁 식사하며 보았을 때는 구름이 많이 모여들고 있었고, 별로 흩어지지도 않고 그대로 하늘을 채워가고 있는 그 구름으로 인해 별들의 모습 역시 모두 숨어 버렸다. 그렇게 일찍 찾아온 어둠은 현재를 제 시간보다 더욱 늦은 시간으로 짐작하게끔 만들어 주니 이 또한 두려움을 은근히 부추기는 한 가지 일이다.


이렇듯 어둠은 나로 하여금 걱정스러운 조바심을 배가 시키게도 만들지만, 어쩌면 이런 공포 실체의 하나인 파도를 어둠이기에 덮어 줄 수 있는 눈 가리고 아옹 식의 역할도 감당하고 나서는 이중적인 면도 가지고 있다.


결국 태풍이란 자연의 위력 앞에 지레 겁을 집어먹고 있을 때면, 이렇듯이 나타나는 두려움의 실체들은 조금씩 모습을 바꾸는 모든 사항이 포함되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음이어라.


뒤집어 이야기한다면 눈 앞에 나타난 여러 가지 상황을 내 마음이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서 모두가 공포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니 너무 미리부터 겁을 집어 먹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결론은 늘 그렇게 내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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