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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은 바뀔 수 있는 것

광양항 접안이 조금 늦어지다.

by 전희태
광양04.JPG 광양 검역묘지에 도착하다.에

새벽 6시 도착하면 즉시 도선사가 타고 부두로 들어간다던 예정을 믿고 그 시간에 도착한다고 항무 광양을 불러 예정의 확인을 받으려 하고 있었다.


항무 광양을 한 번 불러 그 응답을 기다리는 데, 마침 우리 배 부르는 소리가 들려오기에 대답해 주었다. 그런데 항무 광양이 아니고 도선선에서 도선사가 부른 것이다.

본선의 6시 승선 예정이 취소되었다며 대도 등대 남쪽에 있는 <거대선의 묘박지>에 투묘하고 기다리란다. 언제쯤 승선할 예정이냐고 물으니 오늘 오전 중이란다.


아직 깜깜한 어둠 속이라 배의 안전운항에 신경을 쏟고 있던 중에, 예정마저 어그러지니 그 상황을 안타까워하며 즉시 속력을 줄이라는 명령을 기관실로 내린다.


당연히 도착 예정 시간을 알려주고 있었으니, 지금쯤은 엔진을 쓸 수 있게 준비하는 기름 바꾸는 일도 끝났을 텐데 30분 이상 더 기다려야 끝나겠다고 당직 중인 2 기사가 말한다. 그동안 그런 조처는 안 하고 무얼 했단 말인가? 떠오르는 짜증을 이유가 있어 접어 준다.


기름을 바꾼다는 뜻은 전속으로 달릴 때 쓰던 벙커씨-유를, 디젤유로 바꾸어 주어 엔진을 수시로 써야 하는 접안 등 배의 잦은 움직임에 대비한 기관의 준비 사항인 것이다.


여기서 두 기름 간의 가격차이가 만만치 않아 오랜 시간 스탠바이 상태로 디젤유를 사용하는 것은 그만큼 배의 운항경비를 늘어나게 하니, 될수록 스탠바이 시간을 짧게 하려는 경향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을 자주 드나들던 경험은 도선사가 타고도 전속으로 한, 두 시간 이상 더 들어가야 하므로 벙커 체인지를 그만큼 늦출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있다고 여기고 아직은 벙커 체인지를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사정이 변하여 곧 투묘를 하게 되어 당장 기관 스탠바이와 사용이 바빠지게 된 형편을 이해한 것이다.


비상의 방법으로 우선 속력을 하버 스피드(HABOUR SPEED, 기관사용이 가능하게 엔진 RPM을 낮추는 일)로 낮출 수 있으면 당장 그렇게 해달라고 지시 겸 요청을 해본다.

그렇게 할 수 있으니 곧 낮추겠다는 대답과 함께, 즉시 속력이 떨어지는 소리가 감지된다. 브리지 프런트 패널의 기관 RPM 게이지의 지시 바늘도 함께 수그러들기 시작한다.


지정해준 투묘 예정지에는 먼저 와서 투묘하고 있는 배가 두 척 있다.

어디쯤에 닻을 내려줘야 하는가를 레이더를 통해 각선 간 거리를 체크하며 고민에 빠질 무렵 그런 내 심정을 알아내고 피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윗 쪽에 있던 한 척이 아무래도 움직여 묘박지를 빠져나가려는 것 같아 보인다. 쌍안경으로 자세히 살피니 닻을 모두 감아 올리어 방금 까지 켜있던 정박등을 모두 끄고, 항해등으로 바꿔주며 항내 쪽을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확인할 수가 있다. 얼씨구나! 바로 저곳에다 투묘하면 되겠구나. 기쁜 마음으로 항무 광양을 불러 그 자리에 가서 투묘를 해도 되는지를 물었다.


잠시 후 우리 배를 불러낸 항무 광양에서는 그 자리에 투묘가 가능하다는 통보를 해준다. 선수를 그쪽으로 돌리며 이미 스탠바이 상태로 전환된 기관을 정지시키어 타력으로 들어가기로 한다.


자동차라면 브레이크 페달만 밟으면, 거의 그 자리에 서지만, 배는 적어도 자신의 몸길이 몇 배에 달하는 거리를 기관 정지한 상태에서도 전진하는 것이기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미리 정지시킨 것이다.

정밀 투묘를 위해 선수를 투묘 예정지에 그어준 침로에서 벗어나지 않게 유지하려고 미속 전진을 명하여 약간의 전진 속력을 가지게 한 후, 마지막으로 선수부에 앵카 투묘 준비상태를 최종 확인한다.


-스탠바이 스타보드 앵카 써,

선수로부터 대답을 들으며

-렛고 스타보드 앵카!

즉시 투묘하도록 명령한다. 그리고 기관도 정지시킨다.

촤르르~ 쏟아져 나가는 앵커체인의 소리를 들으며, 이제는 남아있는 전진 속력을 막기 위한 마지막 단계의 기관사용 명령을 내려준다.

-Full Astern Engine(기관 전속 후진)!

잠시 후 윙 브리지에서 내려다 보이는 선미로부터 프로펠러가 일으킨 하얀 포말을 퍼 올리는 물 흐름이 뻘 물의 요동을 뭉게구름 모습으로 머금으며, 방금 켜 준 정박등의 불빛 속으로 나타난다.


그 흐름의 끝단이 저쯤까지 이어지면 전진 속력은 멎는다는, 경험에 의한 위치에 접근하는 물거품을 보며 기관정지 명령을 내려준다.

-Stop Engine!

그렇게 도착 즉시 부두로 간다던 예정이 변해서 몇 시간 기다려야 하는 일이 시작됐다.


이런 불확실성을 확실히 하려고 정기선의 스케줄 안내서에도 꼭 들어가는 문구가 있다.

Schedules are subject to change with or without not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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