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박 중 모처럼 시간을 내어 탁족을 즐기다
회사가 주관하는 본선의 무재해 600일 기념행사를 치러내기 위해 이번 항차도 집에 가지 못하고, 배를 지키며 광양에서 지내야겠다는 결정을 하였기에 아내도 이미 내려와 있다.
마침 하역 작업도 한가한 주말의 시간을 육지에 닿아 있으면서도, 배안에 틀어박힌 상태로 지내려 하니 좀 답답한 마음이 든다. 또다시 신세 져야 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손아래 동서인 O서방 집을 아내 자매의 정을 핑계 삼아-실제로 정이 깊기도 하지만- 방문하기로 한다.
일요일이라 집에 있던 동서와는 달포가 좀 넘어 만난 거지만, 단출한 두 식구가 생활하고 있던 그들은 날씨가 좀 꾸물거리는 걸 구시렁 거리면서도, 점심은 고기라도 구워 먹자면서 승용차를 내어 백운산 계곡으로 안내한다. 시내를 달릴 때는 그래도 비는 내리지 않았는데 백운산 산자락에 들어서니 오락가락하던 구름이 몇 방울의 비가 되어 뿌려준다.
며칠 전의 비로 제법 불어나 있는 계곡물의 흰 포말이 내는 물소리가 어느새 귓가를 멍멍하게 해주는 곳도 있다. 지나는 동네, 보이는 집마다 거의 다 민박집이라는 팻말을 붙이고 있으니, 여기가 광양지역의 관광지이거나 여름철 피서지가 되는 모양이다.
얼마 전 공개입찰로 나왔었다는 폐교가 된 초등학교 분교가 있었던 자리의 옆을 지나치면서, 아주 싸게 나왔던 좋은 자리라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한다. 형편이 되었다면 그 학교 자리를 사서 요사이 유행하는 작은 박물관 같이 꾸민 깔끔한 숙박시설이나 작은 연수원으로 만들어도 괜찮았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긴 노후에 이런 공기 좋고 물도 좋은 곳에서 의식주를 해결해 가면서 살 수 있다면 꽤 바람직할 것이란 마음이 들기는 한다. 단지 그럴만한 재정적인 능력이 당장 없는 것이 좀 아쉬울 뿐이다.
이곳 전라도 땅에서 포석정이란 경상도 지명의 이름으로 영업을 하는 음식점을 찾아 오리구이와 닭백숙을 시켜 놓는다. 먼저 들러 보았다가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아 돌아 나왔던 개울 건너편의 음식점 평상에는 계꾼 같아 보이는 여덟 명 네 쌍의 부부 같은 남녀가 보신탕을 커다란 가마솥에 넣고 번갈아 삶아가면서 부추도 살짝살짝 데쳐내고 있다.
나와 아내는 보신탕을 들지 않기에 그런 모습을 흥미로운 마음을 가지고 곁눈질하며 지나쳐 왔는데, 처제 네는 그 음식도 들어 보면 먹을 만하다며, 내가 먹겠다고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그 음식점으로 갈 의향도 있다는 표정들이다. 그래 사람이 먹는 음식인데 무턱대고 거부하는 것도 그렇겠다 싶은 생각에 나도 이제는 그 음식을 기피하지 말고 먹는 쪽으로 생각해야겠다고 아내에게 소곤거려 보았지만 아내의 마음은 요지부동이다.
그럴 때, 우리가 시킨 음식이 나왔다. 그곳에서 키우는 가금류로 만들어낸 음식이 아니고, 오리 고기는 시장에서 파는 걸 사다가 쓰는 것 같고, 닭고기도 살이 퍼석거려서 음식이 별로라는 말들은 하면서도, 배가 고픈 때문인가? 깨끗이 치워낸다.
개울가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한 평상에서 점심을 끝내 갈 무렵, 하늘은 구름을 깨끗이 걷어 주며, 물에 들어가 보라는 유혹을 한다. 양말과 구두 안에 감춰져 있던 발을 해방시키고 바짓가랑이까지 걷어 부친 후, 남자들부터 슬그머니 발을 물속에 넣어 본다.
가슴까지 밀려왔다 온몸으로 퍼져나가는 시원 짜릿한 감각에, 화들짝 하니 놀란 소리도 외쳐보지만, 어느새 입술이 파래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시시덕거리며 모두는 탁족에 빠져 들었다.
그때쯤 되니 건너편 평상에서는 보신탕을 잘 들고 힘이라도 솟아났는지 개울물이 내주는 물소리 반주와 젓가락 두드린 장단이 잘 어울리는 뽕짝의 노래방이 연출되고 있다.
한낮의 백운산 계곡에서 흐르는 물소리와 함께, 잠깐 바다 가운데의 시원함도 만끽하는데, 옆에 있는 낯익은 가족 친척의 모습이, 여기는 배 안이 아니라 산속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다행히 부두에 있는 배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는 평안한 날로 피크닉을 즐길 수 있었음을 감사하며 돌아오는 길 위로 빗방울이 후드득 몇 방울 흩뿌려주다가 또다시 멈추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