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을 들고 난 후, 한참 동안 자리를 뜨지 않고 분위기를 돋우며, 새로 승선한 사람들과 얼굴 익히는 담소를 나누던 중에, 갑자기 기관실에서 경보 음이 몇 번 울리더니 이어서 식당의 전화가 때르릉 울린다. 뛰어가 수화기를 들은 일항사가 기관실 전화라며 수화기를 기관장에게 내밀어 준다. 이기사인데 보일러에 이상이 생겨 정지하고 수리해야 할 것 같다는 연락이라며 기관장은 급히 기관실로 내려간다.
어제 출항하며 치러낸 일의 뒤처리가 모자랐던 것 일가? 결국 와야 할 일이 온 것인가 싶은 마음이 들어선다.
나도 브리지로 올라가 기관 정지 요청이 오면 그대로 따라 주라고 지시한다.
잠시 후 기관 텔레그라프의 벨이 울리어 기관 정지를 요청해 온다. 얼른 응답해주는 이항사에게 수리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지 기관실에 알아보라고 지시한다.
다시 기관실에 전화한 이항사가 30분 정도면 수리가 끝날 수 있겠다는 기관장의 대답을 전해준다.
그 정도 기다리는 것이라면 별 어려움이 없겠거니 여겨져, 편한 마음 되어 윙 브리지로 나간다.
마침 레이더 스코프 상에 우리 배에서 2 마일 정도 떨어진 좌현 쪽으로 우리와는 반대로 북상 중이던 컨테이너 피더(FEEDER) 선인 작은 배가 우리와 비슷한 시간에 멈추어 떠있는 게 보인다.
이 넓은 바다에서 가까이 지나치는 배들이 동시에 기관정지를 하는 이런 일이 발생함은 굉장히 드문 경우라 희한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수리를 끝내 줄 30분을 기다린다. 문득 조류에 밀리다 보면 저 배와 너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닐까? 두 척의 데드쉽이 가까이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드니 은근한 초조감마저 생긴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이 어느새 30분을 넘어가고 있다. 왜 수리 시간을 30분이면 된다고 허위보고를 했단 말인가? 슬슬 안달하는 짜증스러운 마음을 다독거려 보려고 브리지 내부를 서성거린다.
그래도 걱정했던 것 같이 서로의 위치가 접근되지 않고, 무사히 빗겨가며 좀 더 멀어졌기에 충돌이나 접촉에 대한 걱정은 잦아들었다. 어언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갈 무렵, 수리가 끝나 기관을 움직이겠다는 반가운 연락이 왔다. 그대로 따라 주며, 먼 바다를 향한 항해는 다시 재개되었다.
그러겠거니 하고 접어주며 봐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번 수리 사항으로 기관장에 대한 나의 인상은, 출항한 이후 조금씩 껄끄러운 상태로 변화되는 느낌이 들고 있다.
어제 아침 광양을 떠날 때 도선사가 하선한 후, 곧 RUNG UP ENG.(기관 운전을 항해 중 지속적인 정상 속도로 동작되도록 맞춰주는 조치)을 지시했었다. 그런데 그 지시에 대한 응답이 아닌, 보일러에 이상이 생겨 기관을 정지하여 고장 난 개소를 체크 내지 수리를 해야겠다는 요청이 올라온 것이다. 더하여 필요할 경우, 닻을 내리고 수리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말까지 덧 붙여 안 그래도 태풍이 다가오는 난 바다로 나서게 되어 잔뜩 긴장한 나를 한번 더 뜨끔하게 만들었다.
할 수 없이 항만당국에 상황을 통보하고 긴급 묘박지를 얻어내어 그곳으로 들어가려고 배를 돌렸고, 기관실에 연락, 당시 조치사항을 알려주니, 세우지 않고도 계속 항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하여 다시 투묘 예정을 취소하는 통보를 내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런 사유들을 간직한 채, 겨우 출항을 끝내고 나서 저녁 식사를 나누던 자리에서 이번에는 광양에서 수리를 한 기관실 컴퓨터가 다시 고장이 났는데 내 방의 컴퓨터와 바꿔 쓰면 어떻겠는가? 하고 물어 온다. 그 물음이 나를 떨떠름하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기관실 컴퓨터가 다시 작동한다는 보고를 조금 후 전해 주었다.
좀은 진득하니 일 처리를 못 하고 순발력(?) 뽐내듯 가볍게 행하는 그런 식의 행동거지에 영 실망을 하던 참인데, 이번에는 2시간이나 걸려서야 끝장을 보게 된 수리를 30분이면 끝낸다고 이야기하는 실수(?)를 하여, 결과적으로 자신의 일에 대한 정확한 꿰뚫음이 없는 형편없는 안목을 가진 사람으로 비추게 만들어 또 나를 실망시킨 것이다.
하기야 선입견이 많이 작용한 나의 그 사람을 평가하는 잣대 때문에, -그중엔 우리 배에 타기 전 그의 행보를 여러 가닥에서 전해준 이야기도 있다.- 혹시 삐뚤어졌을 수도 있는 정보가, 그를 못 미더워하는 판단에 일조를 한 건 아닐까? 하는 상념도 든다.
어찌 됐건 자신의 일에 대해 모자라는 것이 많다는 그에 대한 느낌이 너무나 강하여, 앞으로 같이 생활할 동안에, 그를 대 할 내 태도에 각별한 조심을 해야겠다는 경각심을 품게 되었다.
더하여 앞으로 어떠한 작업을 하든, 그 작업에 필요한 시간 산출을 알려줄 때는, 좀 더 정확을 기하여 산출해 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은 어차피 하고 넘어가야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