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망대해에서 만난 어느 하루의 시작 일기
보름을 이틀이나 지나고 있지만 반 공중에 걸린 달은 보름 밤 못지않은 모양새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어, 평소의 새벽 5시라면 어두워서 사물 판별이 어려울 시간이지만, 갑판을 빠른 걸음으로 돌아야 하는 운동에도 결코 큰 지장을 주지 않을 정도로 밝음을 지키고 있다.
어제 에어컨디셔너가 고장 나서 밤새 고쳤던 모양이지만 아직까지도 완료되지 못해 밤새도록 냉방기의 도움이 없는 속에서 잠을 잤건만, 계절을 겨울의 끝자락에서 살고 있는 호주의 먼 해안을 따라 남하하고 있는 상황이므로, 별로 더위를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운동 전 갑판으로 나선 몸은 서늘한 한기마저 갖게 했던 날씨이다.
정남을 선수(船首)로 고정하며 달리는 중이기에 왼쪽이 동쪽이고 오른쪽이 서쪽인데 하필 그 모두의 수평선 부근은 구름이 많이 모여 있는 상황이다.
어느새 서편으로 많이 기울어 간 둥근달이 그 구름의 가장자리에 들어서며 자태가 가려지는데 나는 목표로 삼고 있던 운동량을 거의 다 채워가고 있다.
사방이 좀 더 밝아지는 건, 동녘으로 솟아나려는 태양이 그 준비로 빚어내는 하늘과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여명(黎明)의 숨결 때문이다.
아직도 서쪽 하늘가에 머무르고 있는 구름 속의 달은 구름이 틈을 만들어준 사이사이로 한 번씩 그 자태를 내보이어 자신이 존재함을 과시하려는 것 같지만, 반대쪽 하늘 가를 붉게 물들이며 꿈틀거리는 태양의 출현이 마냥 버거운 상대인지 그 모습이 갈수록 창백하게 색을 바래가고 있다.
그래도 자신이 올라있는 발 밑 바다 위로는 엷으나마 빛의 트랙을 남겨주며 버텨보지만, 점점 밝아오는 반대편의 기운을 이기기에는 역부족인 모습이 역력하다.
드디어 금색의 붉은 수평선의 기운(氣運)에서 눈에 드는 새빨간 동그란 모습으로 변신한 해가 바다를 차고 오르며 그 붉고 환한 끼의 트랙을 양탄자 마냥 해면 위로 깔아내어 나의 배 옆에까지 보내준다. 이미 싸움이 안 되는 걸 알았던지, 아니면 구름의 시샘에 얽혀 든 때문인지 달은 다시 들어선 구름 속을 헤쳐 나올 생각일랑 아예 포기한 채 그냥 서녘의 제갈 길을 찾아 가버린 모양이다.
오늘도 오후가 되면 다시 윤회의 동녘을 잡아 떠 오를 <뜨는 달>이 되기를 기약하였기에, 이 아침을 열어주며 기세를 돋우고 있는 저 붉은 해에게 양보는 하지만, 태양 역시 때를 당하면 별수 없이 서녘을 향한 <지는 해>가 되리라는 진리를 마음에 새겨가며 떠난 달 일러라.
그리 떠나간 달 없는 하늘가를 태양의 기승(氣勝)이 가득 메워주니, 모든 걸 가려주던 구름마저 흩뿌려진 천공에선 홀연히 넘쳐 나는 짙은 청색에 온바다가 검게 물들고 있다.
이렇듯 갑판을 돌면서 색깔 짙은 하루가 시작되는 광경을 지켜보는 가운데 문득 이런 조용한 달과 화려한 해의 교대가 주는 안온함과 역동적인 대비가 절로 걸음을 멈추게 했던 건데, 느긋하게 들이켜주는 심호흡으로 이 모두를 포용해주니 다가서는 오늘이 은근하기만 하다.
날이면 날마다 이런 풍경을 볼 수 있는 바다 위가 결코 아니기에, 모처럼 주어진 평온한 날씨가 배 타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축복임을 감사하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