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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마시며 이야기 하자는 것

중요한 이야기라면 술 안 마시고 하면 좋으련만.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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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다. 하루 일과를 끝내 가는 저녁 식사가 시작될 무렵인 오후 17시 30분.(원래의 저녁 식사 시작은 18 시이다.) 싸롱 사관 식탁의 내 자리를 찾아갔지만 아직 식사를 하러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 옆에 있는 주니어 사관 식탁에만 2등 항해사, 3등 항해사와 실습 항해사까지 항해사들만 모여서 식사를 하고 있다.


기관장을 비롯한 기관부의 사관들이 여러 가지 수리작업 때문에 식사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워서, 앞으로는 작업 시간이 길어져서 식사시간이 되면, 특별히 시간을 다퉈야 하는 긴급을 요하는 작업이 아니라면, 일단 작업을 중단하고 식사부터 하고 난 후 다시 시작하자는 이야기를 점심 식사 때 했는데, 아직까지 아무도 안 오고 작업에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수저를 천천히 들어 30분이 넘게 혼자 식사를 하며 기다렸건만, 아무도 오지 않기에 그냥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방으로 가다가 노래방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노래를 듣고 좀 해보는 시늉이라도 하며 울적해진 마음을 달래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렇게 한 시간쯤 혼자 지내고 있는데, 늦은 식사를 끝낸 기관장이 찾아오더니 노래하는데 참여하겠단다.

몇 곡만 더 듣고 일어서려던 참이었지만, 그냥 같이 노래를 하자는데 부득불 떨치고 일어나기도 무엇 해 주저앉고 보니, 이번에는 맥주나 한잔하자고 한다.


오늘은 술 생각이 없다며 마시지 않겠다고 사양을 하니 알았다고 하면서 20 시에 당직이 끝나는 일항사와 일기사를 오라고 연락을 한다.

잠시 후 냉장고에 보관하고 있든 맥주가 박스 채로 왔지만, 나는 억지로 권하는 한 캔만 받아놓고 버티고 있었는데 마침 당직을 끝낸 일항사가 나타난다.

그러나 일기사는 계속되는 작업으로 인해 피곤해서인지 불참하여 세 사람이 번갈아 가며 노래를 신청해 놓고 부르다 보니 어느덧 10시가 되었다.


아직 맥주는 3분의 2가 남아 있지만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마시고 자리를 뜨려고 하였는데 기관장이 말리면서,

-술 한 잔 하고 할 이야기도 있는 것 아닙니까? 하더니,

일항사를 붙잡아 놓으며 이야기를 좀 나누게 노래방에 잠시만 더 있다가 올라가겠다며 나더라는 방으로 올라가라고 부축하다시피 끌어당긴다.


아무래도 두 사람만 놓아두고 나 혼자 올라가는 것이 께름칙하여 모두 올라가자고 했지만, 부득불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며,

-선장님! 기관장의 기 좀 살려 주십시오.

떼까지 쓰고 나온다.

정색을 하고 헤어졌으면 좋으련만, 비록 술기운에 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처음으로 부탁하는 일인데 야박하게 떨쳐내기도 뭣해,

-알잖아? 일항사는 새벽 당직을 서야 하는 사람이니까 될수록 빨리 끝내도록 해요.

되레 부탁하는 말을 하며 못 이기는 체 그 자리를 떠났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한다는 걸 막으려는 이유는 있었다. 기관장은 술만 마시면 다른 사람들을 불러서 늦도록 까지 술판을 계속하던가, 잔소리가 있다던가 하여간 바람직하지 못한 음주 습관을 가지고 있다는 소문을, 그가 우리 배에 승선한다고 결정된 이후에 여기저기를 통해 들려왔던 걸 기억하기 때문이다.


일항사는 새벽 4시부터 항해 당직을 서야 하는데 당직 조타수도 없이(조타수들을 낮에 정비를 위한 주간 일과 팀에 투입하려고 항해 당직에서 빼어 놓고 있었다.) 혼자서 근무하도록 해 놓았기에 너무 늦게까지 잠을 안 자면 당직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므로 빨리 끝내라고 한 것이다.

먼저 올라 오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마음이 안 놓여서 방에서 잠도 못 자고 기관장의 방문이 닫히는 걸 기다리고 있었다.


11시가 되어도 올라오는 기척이 없어 노래방으로 전화를 거니 일 항사가 받는다.

-아직도 안 자고 뭐해? 빨리 끝내고 자도록 해야지.

그렇게 일차 주의를 환기시켰지만 다시 한 시간이 지나 12시가 되었어도 마찬가지의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이번에는 직접 내려가서 노래방 문을 열고

-빨리 끝내지 않고 뭐 하는 거야?

짜증이 섞인 음성을 내었다.


많이 취한 상태의 기관장이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가 내 목소리를 듣고는 앞에 앉아있는 일항사에게 올라가라는 손짓을 한 후 탁자에 팔뚝을 고이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는 것이 보인다. 모르긴 몰라도,

-선장님은 왜 이렇게 제 마음을 몰라 주십니까?

하는 몸으로 말하는 표시 같다.

하지만 혈중 알코올 농도를 재어 본다면 이미 경고 치를 넘긴 것이 확실시되어 보이도록 술을 마신 상태에서 표현되는 그 모습을 보며 우선은 이 자리를 파해야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라고 여겨지는 일이다.

단호한 태도를 보이어 엉거주춤 일어서는 일항사에게 길을 내줘서 밖으로 나오게 해 준 후, 다음 당직을 위해 빨리 자라고 말해주며 나도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 일의 무사한 끝맺음이 될 수 있는, 그 사람, 기관장의 자기 방으로의 복귀를 확인하려고 방문도 안 닫고 기다렸는데 한 20분쯤 더 지날 무렵,

-꽝!

하는 기관장의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복도를 넘어 들려온다.

겨우 안심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오늘따라 누운 침대를 통 하여 전해지는 배의 울렁거리는 잔잔한 진동음이 왜 이리도 피곤함을 재촉하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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