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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 올림픽이 시작되던 날

by 전희태


JJS_2487.JPG 닻을 내려줄 자리를 찾아 가다.

우리 배의 항로를 추천해주는 KS WEATHER의 안내에서도 그랬고 어제 아침까지 받아 본 호주 기상 정보를 봐도 그랬지만, 우리가 뉴캐슬에 도착할 무렵에는 바람이 제법 불어주는 좋지 않은 날씨가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새벽 다섯 시에 브리지에 올라가 보니 휘황한 달빛이 바다 위에 펼쳐놓은 반짝이는 트랙으로 인해 비록 수평선이 조금은 뿌옇게 흐려있기는 했지만 예상과는 달리 밝고 바람도 잦아들어 있는 조용하고 맑은 날씨이다.

어제 새벽녘에 해와 달의 등장과 퇴장을 관찰하면서 느꼈던, 쫓기는 한을 품게 된 달이 저녁때를 다시 재기의 시기로 노린 모양이란 생각을 했었는데 더하여 오늘 새벽마저 제패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이미 동녘에서는 그쪽에서 해가 올라온다는 표지를 한껏 뽐내듯, 황금빛을 섞어 붉은 기운으로 물들여놓았건만, 달은 주위 하늘에서 모든 구름을 몰아내고 아직도 둥근 보름달의 모습을 잊지 않은 채 달빛을 한없이 쏟아내며 의기양양한 자태를 뽐내고 있다.

하나 그것은 해와 달이 서로를 인정하며 <생성과 소멸>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면서, 인류가 자신들의 화합을 자랑해보려 만든 스포츠 제전인 시드니 올림픽을 빛나게 해주려고 호주의 자연이 베풀어 주는 합작품이 아닐까? 내 맘대로의 억지 생각을 그렇게 둘러대 본다.


오늘이 바로 2000년대에 들어서며 처음으로 열리는 올림픽인 시드니올림픽이 개막식을 갖게 되는 날 임에 그 행사를 축복하기 위한 일이 아니라면 예상을 뒤엎는 이런 좋은 날씨가 마련됐다는 것을 설명할 길이 없어 보이어 괜스레 날씨를 두고 견강부회(牽强附會)해본 심정이 그렇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주위 환경에 대한 기분 좋은 감정을 가지고 아침나절에 뉴캐슬의 외항에 접근하였고, 이제 원하는 자리에 닻을 내려주려고 천천히 투묘지로 접근하여 먼저 투묘하고 있는 배들 사이를 누비며 들어가고 있었다.

갑자기 하버 컨트롤에서 우리 배를 부른다. 즉시 응답하고 나가니 우리 배가 접근하고 있는 좌현 앞쪽에 먼저와 투묘 대기하고 있던 일본 배가 닻을 감아 도선사를 태우고 항 내로 들어갈 것이란 정보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좋은 투묘지 정보를 귀띔해준 것이기에 그 자리를 빗겨서 더 안쪽으로 들어가려던 생각을 거두고 그들의 친절에 따르기로 투묘 예정지를 변경한다.


이미 사용 준비를 하고 있던 엔진을 <STOP ENG.> 오더로 정지시킨 후 타력만으로 서서히 그 배가 닻을 감아 들이고 있는 자리의 꽁무니 쪽을 향하려고, 키를 좌현 10도로 돌려놓으라는 조타 명령인 <PORT TEN!> 까지 발령한다.


한참 지나면서 아직 그 배의 닻이 해저에서 떨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우리 배의 선수가 너무 빠르게 그 배 후미로 접근하는 것 같아 좀 피하는 동작을 취하려고 <S/H ENG.(기관의 미속 전진 명령)>의 명령을 내리며, 조타 지시도 키를 오른쪽으로 최대(35도) 돌리라는 명령인 <HARD STABOARD.>를 발령하여 빠르게 왼쪽으로 돌고 있던 회두 속력을 얼른 줄이기로 한다.


당연히 엔진이 걸리는 걸 의심하지 않고 행한 일련의 조선 행위(操船行爲)였는데 엔진 기동의 소리도 없고 엔진의 RPM을 나타내는 지시기의 지시 침 역시 꿈적도 안 하고 버티고 있다. 기관이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는 일, 기관 사용 불능의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빨리 닻을 놓으려는 마음에 좀 더 서두르며 투묘지에 접근했었다 면 아차! 하는 순간에 충돌이나 접촉의 사고도 날 수 있는 아찔한 경우였지만, 다행히 이 상태에서 조금만 더 타력을 낮춰주며 접근하면 투묘를 해도 되겠다는 판단이 섰기에 휴-우 하는 안도의 쉼을 내쉴 수가 있었다.


이렇듯 아슬아슬한 사정을 내재하면서도 어렵사리 아침 9시까지 투묘 작업을 무사히 끝내었고 이제부터 엔진 시동이 안 걸린 일을 접안 전까지 해결하기 위한 수리 작업에 기관부원 모두가 동원되어야 할 일이 남게 되었다.


그런데 이 사고에 대해서 워키토키를 통해 이야기하는 기관장의 음색이 별로 미안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것 같아 이상한 생각이 든다. 물론 기관장이 그러고 싶어서 발생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신이 책임 맡고 있는 기계가 말썽을 부렸으니 일단은 그로 인해 심적으로 피해를 당하고 있는 나에 대해서는 최소한의 예의에서라도 미안한 감정을 보이는 것이 마땅할 것인데 그런 표현이나 음성이 아니라고 감지하니 떨떠름하게 느낀 것이다.


-수리하는데 수고가 많겠어.

다가 올 고생을 위로하는 의미의 말이기도 하지만 나의 감정도 약간 섞인 뜻을 담아 건네준 말인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지만 좀 길어질 것 같네요.

기관장은 별다른 감정을 싣지 않은 대답을 해온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앞서 나가는 오해를 했던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별일이 아닐 것이니, 곧 해결될 것이란 믿음을 앞세우며 늦어진 아침식사를 하러 식당으로 내려갔다.


예전 캐나다의 로버트 뱅크에 기항했을 적에 도착 즉시 그대로 부두에 접안하려다가 오늘 같이 엔진이 말을 듣지 않는 사고를 당하면서, 순간적으로 부두와 부딪치며 펜더 등 시설물을 파손시켰었던 사고를 상기해내며, 오늘은 그런 일이 발생되지 않았으니 다행이라는 안도감을 즐거워하며 식탁에 앉는다.


마침 기관실에서 식당으로 바로 올라온 기관장이 식탁에 앉으면서

-오늘 주기가 말썽을 부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차분하게 유감의 인사부터 하는 여유를 보니, 잠깐이나마 떨떠름하게 생각했던 마음이 오해였음을 깨닫는다.

아까는 수리할 생각에 마음이 바빠서 인사하고 어쩌고 할 여유가 없었을 것이란 상대의 입장을 순리대로 이해해주질 못했던 내 불찰로 결론을 내린다.


맑은 하늘이 바다에서 육지로 밀려오는 구름으로 인해 옅은 안개를 NOBBYS HEAD(호주 뉴캐슬 항 입구에 있는 등대)를 위시하여 방파제가 있는 육지 쪽을 약간은 뿌옇게 가려주기 시작하고 있다.

부두 접안은 사흘을 기다렸다가 있을 예정이란 대리점의 통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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