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안 상태에서 거의 모든 게 쉬고 있으니...
항구 안에 들어서면 어지간한 바람에는 끄떡없는 양항이지만 항구의 입구 쪽을 90도로 쳐들어 오는 높은 파도가 있을 경우에는 입항할 때, 횡요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요망되며 심할 경우 입항을 금지하는 수도 있는 항구가 뉴캐슬 항이다.
어제의 접안 계획은 갑자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천방지축 날뛰는 고삐 풀린 망아지 마냥 이랬다 저랬다 몇 번씩 바뀌더니, 결국 오늘 아침 6시 30분 도선사 승선으로 낙착되었다.
새벽녘 닻을 감기 전에, 계속된 수리를 가졌던 주기관의 사용 전 마지막 테스트를 해 보니, 시동은 걸리지만 15초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고, 압축 공기의 사용량이 수리하기 전보다 과도하게 소비되는 것으로 나타나서 은근히 걱정되는 마음을 갈무리하며 닻을 감기 시작했다.
40 여 분만에 닻을 다 감아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도선사의 헬리콥터를 부르니 잠시 후 도착하겠단다. 아직 어둠의 마지막 자락은 남아있지만, 평온한 해면 위를 배가 움직이며 생기는 약간의 바람을 10시 방향에서 받도록 선수를 잡고 속력도 올리는데 헬기의 접근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7번 창 해치 폰툰 위에 사뿐히 내려앉은 헬리콥터에서 도선사가 내린다.
마중 나가 있던 3 항사가 그를 데리고 브리지에 왔는데 인사를 하려고 얼굴을 보니 마침 지난 125항차에 이곳 뉴캐슬에 입항할 때, 방파제를 들어서며 순간적으로 28도의 경사를 주었던 커다란 너울에게 같이 당하며 고생스레 배를 몰았던 바로 그때 그 도선사이다. 동그란 눈이 선해 보이는 모습이며 아랫배가 좀 볼록하니 튀어나왔지만 명랑하고 배도 잘 조선하는 사람이었다. 반갑게 재회의 악수를 하며 속내 역시 한시름 놓게 된 기분이 좋다.
기관장이 엔진을 짧은 시간에 자주 사용하면 앞으로 몇 번 더 사용할 수 있는 압축공기 밖에 없다며 하소연하던 말을 듣게 하는 현재 기관 상황을 그에게 솔직하게 그대로 설명해준다.
상황을 이해해 준 그 도선사는 기관사용을 최소로 행하는 협조로 부두에 접근해서는 엔진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예인선만으로 접안을 끝내어 한 숨 돌리게 해주었다.
이렇게 서두르며 부두에 접안시킨 것은 아마도 내일 정오 부근의 고조시에 출항시키려는 의도 때문이라 지레짐작하면서 입항 수속하러 올라온 대리점 원에게 출항 계획부터 물어보니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상이한 이야기를 한다.
어쩌면 일요일도 없이 요 며칠을 생활해 온 우리 승조 원들을 잠시나마 쉬라고 배려해 준 하늘의 배려(?)인가, 아직 화물의 준비가 안 되어 확실한 시작 시간은 모르지만, 우선은 내일 밤쯤 시작하여 목요일 날 출항할 예정을 세우고 있단다.
-송화주가 우리더러 시드니 올림픽을 보고 가라고 그러는 모양이라고 농담을 걸었더니 대리 점원도 웃는다.
한데 이렇게 늦어지게 되어 그야말로 모처럼 한가한 시간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또 먼저 떠오르는 건,
-아! 금 항차를 아내가 동승하여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이다.
이번 집을 떠나올 때 최종 결정했던 가족 동승을 포기한 일이 그렇게나 후회스럽다.
사실 아내는 이번 항차 동승하려고 모든 준비를 다하고 있었다. 결정 막판에 군에 간 막내가 첫 휴가를 나온다는 소식을 접하며 어미 아비가 모두 집에 없으면, 그 애가 퍽 섭섭해할 것이란 생각 때문에 포기했던 것인데 오늘의 형편을 만나니 새삼 아쉬움이 커지는 거다.
사실 배를 타면서 이렇게 편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손꼽아 셀 수 있을 정도의, 별로 흔하지 않게 만나는 기회이다. 그런데 아무 하는 일 없이 그 좋은 기회를 보내게 되다니 참으로 아쉬움이 넘치는 일이다.
그러나 선식 회사 J사장 말을 들어보건 데 지금의 시드니는 외부사람들로 너무나 복잡하고 게다가 한낮은 제법 뜨거운 뙤약볕이라 자기네들은 별로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배 안에서 쉬는 것이 오히려 편안한 일이라고 치켜세우니 조금은 위로(?)의 마음을 가져본다.
대리점이 전달해주는 선용금을 선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니 이제 바쁜 일은 모두 처리되었고 쉬는 일만 남았다. 우리 배의 주 임무인 석탄 싣는 하역 작업을 안 하니 선실 바깥도 조용하고, 선실 내는 지난번 에어컨디셔너가 고장 난 후 고치기는 했으나 완전치 못하다고 판단하여 아끼느라고 운용을 잠시 정지 중이라 더욱 조용함을 보태어 마치 깊은 산속 외따로 떨어져 있는 산사에라도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을 갖게 한다.
배 안에는 항해 정박을 가리지 않고 돌아가는 발전기가 꾸준한 소음의 주인공이고, 각종 모터나 펌프는 거의가 강제로 순환시키는 일들을 하는 기계이므로 사용 중일 때는 큰 소음을 발생시킬 수밖에 없지만, 거의 모든 기계가 쉬고 있는 형편이고 게다가 쾌적한 공기와 실내온도를 만들어 주느라 전 시간을 작동하는 에어컨디셔너 마저 정지된 상태로 발전기만이 살아있는 조용함 속이니 마냥 조용한 거다.
우리들은 배에 승선하기 위해 현문을 들어서는 순간부터, 귓속을 맴도는 여러 소리들의 복합적인 소음 속에서 생활해야 하므로, 늘 그런 형편이 당연한 걸로 인식하며 살아왔던 건데, 이렇듯 맞이한 고즈넉함은 하역 작업조차 없는 때문에 손발마저 편해졌으니 산사의 적요(寂寥)를 떠올림이 무리가 아닌 것이다.
용건을 가지고 배를 찾아왔던 이들도 다 가고, 찾아 올 이 더 없는 시간이 왔다. 의자에 앉아도, 침대에 걸터 누워도 마냥 편안할 뿐이다. 온몸을 차분하니 가라앉히는 안온한 기쁨을 안겨주는 뉴캐슬 항의 조용함이 밝은 태양 아래 창 밖으로 찾아와 외출을 유혹하고 또 그냥 편하게 쉬고 있으라고 말리는 일을 번갈아 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