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지 출입 시 복장상태
배 안에서는 선장의 권위를 지켜주는 관습으로 볼 수 있는 <선장의 의자>가 있다.
선장이 테이블 마스터가 되는 식탁에 있는 이 의자는, 그 자리가 중요한 것으로 다른 곳에다 옮겨주면 그 의미가 사라지는 그냥 의자로 될 수 있지만, 선장의 식탁 자리에 놓였을 때는 선장만이 앉을 수 있는 배타적인 의자로 누구에게나 공인되어있는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비록 그 배의 선주라 할지라도 그 자리는 선장에게 양보하고 다른 자리에 앉아야 하는 걸로 굳어진 관습이 오늘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예전의 선장 권위와 비교하면 하늘과 땅 사이만큼이나 차이가 나는 것이 요즈음 현실의 선장님들 위치이지만, 이 선장 의자 관습이 그나마 남아있어 예전의 막강했던 선장의 모습을 유추해보는 그나마의 그루터기 라 스스로를 위로해 보는 게 현실이다.
이와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는 관습 중에서 항해 중의 모든 명령이 내려지는 선박 운용의 장소인 브리지를 매우 엄숙한 분위기가 요구되는 곳으로 하여, 그곳을 출입할 때는 각별히 단정한 복장의 착용을 요구하여 왔다. 신발도 구두를 위시하여 옷에 맞게 신어야 하므로 슬리퍼는 단연 배격되어 내가 배를 처음으로 승선했던 시절에는 구두 이외의 신발을 신고 브리지를 출입했다가 윗사람 눈에 띄었을 경우 대단히 큰 실례를 범한 일로 지적되어 눈물이 쏙 날 정도의 질책이나 심지어는 체벌도 받을 정도로 금해진 일이었다. 물론 옷차림도 신발(구두)에 맞는 정갈한 차림새를 함께 요구받아 작업복 차림도 제외 대상이었다.
그런 무언의 교육을 받으며 또 남에게 베풀며 살아온 30여 년의 세월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너무나 딱딱한 이 관습을 나만이라도 바꿔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브리지 당직 근무자들을 될 수 있는 대로 편하게 해 주고 무좀 등 발의 위생에도 도움이 되게 통풍이 되도록 만들어진 구두의 사용을 막지 않고 허락해주는 조치를 눈감아 주기로 한 것이다.
그야말로 배를 타면서 처음으로 브리지에 올라가 승선 일호로 배웠던 관습을 30여 년이 지나면서 겨우 바꾸려고 한 나의 이 의도가 어쩌면 관습에 얽매인 일이 많은 선상 생활에서 파격적인 한 가지 일이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처음부터 편했을 테니까 나의 의도대로 잘 지켜주며 브리지의 출입을 하고 있었다.
작년 이 배에 와서 처음으로 승선하며 시작했던 이 일이 그렇게 한 일 년은 그런대로 잘 지켜지며 모두가 그 편해진 것에 대해 즐기는 분위기로 보였는데, 사람들의 속성인 <말 타면 견마 잡히고 싶은 심정> 때문일까? 요즈음에 와서 간간이 눈에 뜨이는 또 다른 모습에 은근히 부아가 솟아난다.
실시 첫 무렵의 의도는 그래도 브리지에서 최소한의 예의는 갖추기 위해 발뒤축이 없는 신발-즉 슬리퍼-의 사용은 아무래도 보기에도 안 좋고 일하는데도 안전에 지장이 있으므로 금한다고 분명히 밝혔었는데, 그 말의 뒤끝이 없어지며 공공연하게 슬리퍼를 신고 브리지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나고 있는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들을 모아 놓고 따따부따 하느니 점잖고 유머 있는 방식을 택하여 이 일의 실행 방법에 정정을 가하기로 했다. <브리지에 드나드는 귀하의 현재 복장은 단정합니까?>라는 물음을 던져주기로 마음먹고 컴퓨터에서 그런 모양을 만들어 낸 후, 브리지 출입문에 게시하도록 3 항사에게 지시했다.
그 문구의 밑에 사족을 달아,
단정치 못한 복장이란 →
1) 발뒤축이 없는 신발(슬리퍼)을 신은 상태
2) 신발 뒤축을 꺾어 신은 상태.
3) 양말 안신은 맨발로 신발을 착용한 상태.
4) 더럽혀진 작업화를 신고 있는 상태.
5) 기타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좀 찜찜하게 느껴지는 복장상태.
←등을 말하는 것입니다.
라는 친절한 문구까지 넣어서 코팅 필름으로 커버를 씌워서 브리지 출입문에 떡 하니 붙여 놓게 한 것이다.
아마도 무소불위(?)였던 선장보다도 더 편한 차림새로 보이는, 그야말로 단정치 못한 복장과 신발 착용 상태를 한 채 브리지를 드나드는 사람들을 보면서 은근히 기분이 나빠 있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