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피하며 달려가기
갑판에서 페인트 칠 작업을 하다가 갑자기 쏟아지는 비를 만나면 대부분의 배에서는 그를 피하기 위해 선수를 돌려주는 일을 한다.
일요일인 어제는 쉬었고 공휴일인 내일도 쉬겠지만, 그 사이에 샌드위치로 끼어 있는 일하는 날인 오늘은 쉬기는커녕 입항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때문에 그동안 정비했던 갑판 부위의 페인트 칠을 더 하여 칠의 도막을 두툼하게 키워주기 위한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어쩌면 내일도 선원들의 양해를 구하고 일을 더 해야 할지도 모를 형편이다. 그러다 보니 저녁 과업 종료시간인 다섯 시가 지났지만, 아직도 마지막 손질을 멈추지 못하고 바쁘게 롤러브러시를 놀리고 있다.
이번 광양에서 하선 교대할 사람들에 대한 회사의 이메일 전문을 가지고 일항사와 이야기하면서 마침 그런 작업광경을 브리지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눈길이 좀 더 앞쪽 선수 수평선에 닿으니 수평선을 가린 채 하늘을 가득 메운 비구름이 빠르게 다가오는 움직임이 보인다. 몇 분 후이면 정면으로 소나기를 만나게 될 형편이 된 것이다.
지금 칠하고 있는 페인트가 그 비를 맞게 되면, 금세 벗겨지게 되므로 저렇게 열심히 칠한 것이 도로 아미타불이 될 것이다. 순간적으로 배를 좀 돌려서라도 비 맞는 일은 피해주기로 작정한다.
하던 일을 뒤로 미루고 윙 브리지로 나가 바람의 방향을 살핀 후 타를 오른쪽으로 힘껏 돌리도록 일항사에게 지시한다.
딸가닥거리며 자이로 컴퍼스의 방위 카드 돌아가는 소리가 조용한 브리지 내를 울릴 때 앞쪽의 비구름 덩어리가 빠른 속력으로 왼쪽으로 흘러가기 시작한다. 몇 방울의 비가 스치듯 배를 지나치는 데 선수가 돌아가는 쪽에서는 어서 오라고 우리를 반기는 푸른 하늘이 터져 있어 뽀송뽀송하니 갑판의 칠해진 페인트를 광나고 잘 마른 상태로 유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한다.
이렇게 배를 돌려준 것만큼, 페인트 칠 작업에서의 이해득실을 따지면, 이익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어쩌면 배를 돌린 그만큼의 거리는 늘어나는 셈이니 연료유를 더 써야 하고 도착시간도 고만큼 늦어진다는 계산으로도 할 수 있으니 이해득실은 어쩌면 피장파장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도착 시간을 예상의 7일 날 밤에서 8일 날 새벽의 여명 시간에 맞추기로 작정하고 달리는 마당에, 그 정도의 늦어짐은 오히려 가까이 가서 ETA를 맞추기 위해 속력을 늦추는 등의 고생하는 일을 미리 덜어주는 셈도 되니, 또 한 번 이로운 일이 많다는 쪽으로 손을 들어주고 싶은 기분이 든다.
배가 한창 돌아가는데 이제는 페인트 칠을 모두 마친 갑판 부원들이 거주구역으로 돌아오면서, 눈길을 뒤로 돌려 방금 자신들이 칠해 놓은 갑판과 멀리 선수 너머 왼쪽으로 멀어지는 비구름의 모습을 힐끔거리며 걸음을 옮기고 있다.
몇 방울의 비만 스치듯 지나고, 굵은 소나기의 빗줄기는 어느새 저만큼 멀리로 빠져버리는 모습에 신나 하며 브리지를 향한 손짓에 감사하다는 표시까지 보내준다.
배는 여전히 돌리기 전이나 다름없이 굳건하게 원의 중심을 지킨 채, 기관의 씩씩한 숨소리를 뱉어내며 바다의 한가운데를 열심히 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