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를 잠가줘야 하는 상황
신조 인수이래 사용해 오던 내 방의 냉장고에 작은 고장이 나서, 수리 신청을 내었는데, 신청서를 접수한 담당 공무감독은 서류를 살펴보더니, 수리하기보다는 새 것으로 바꾸는 것이 오히려 경비가 적게 든다며, 새 것으로 올려 주겠다는 통보를 지난번 연가를 부여받아 하선하려고 할 때 알려왔었다.
그 후 연가를 잘 쉰 후 다시 승선하여 돌아와 보니 새로 올린 냉장고가 원래 있던 것보다 키가 큰 사이즈의 다른 종류여서 먼저 있던 냉장고 설치 박스에는 들어가질 못하고 있었다. 나를 교대해 주었던 릴리프 선장은 그 옆자리에다 임시로 묶어서 고박해 놓고 사용하다가, 연가 후 다시 교대하러 찾아온 나에게 그대로 인계해주고 배를 떠났다.
결국 책임 선장인 내가 해결해줘야 할 일로 넘겨받으며 이미 폐기 처분해 버렸던 먼저 번 냉장고 자리에 설비되어 있던 수납장에게 톱질과 망치질을 가하여, 키를 높이도록 해주어, 그 자리로 다시 끌어들이게 하였다.
그 일이 석 달 전에 한 일인데 그러다 보니 높이가 높아져서 외부 문짝이 있어도 다시 달아 쓸 수가 없는 형편이 되었고, 그나마 문짝도 이미 없어 진지 오래되어 그냥 팽개쳐두고 있었다.
두 항차 전 뉴캐슬에 입항할 때, 갑자기 심하게 찾아온 롤링으로 냉장고 문이 저절로 열리며 그 안에 있던 깡통, 병 그리고 과일과 먹다 남은 것을 넣어둔 것, 모두가 온방에 흩어져서 제멋대로 뒹구는 일을 당하였다.
흩어진 물건들을 다시 담아 넣으며 문이 저절로 열리지 않게 잠금장치를 해야겠다는 생각은 했으면서도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어느덧 두 달이 또 지났던 것이다.
이제 악명 높은 북태평양을 건너가고 건너와야 하는 항해가 코 앞에 닥치고 보니 이번에는 기필코 잠금장치를 해야겠다는 절박성에 일항사에게 일단 나의 생각을 이야기해 뒀다.
캐나다로의 기항으로 인한 PSC와 BULKER INSPECTION에 대비한 점검과 작은 수리작업을 해오며 바
빠있던 일항사가 낮에 찾아와서는 어떤 식의 냉장고 잠금장치를 원하는지 의논해왔다.
우선 쓸 만한 물건을 구하려고 브리지에 있는 만물 잡동사니를 넣어둔 깡통 상자를 뒤져서, 의자를 방바닥에 고정시키는데 쓰이던 FASTENER에서 걸쇠를 떼어냈고 그 걸쇠를 걸어줄 수 있는 고리는 PORT 창문을 열어 놓고 고정할 때 쓰이던 것에서 찾아내었다.
이 걸쇠와 고리를 합치시켜서 냉장고 문이 열리는 걸 방지해 줄 이음줄은 적당한 굵기의 나일론 끈을 보태어 서 일을 벌이기로 했다.
냉장고의 냉동실과 냉장실 문을 한 목에 열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걸쇠를 고리에 걸어 잠갔을 때 줄의 모습이 삼각형의 두 변이 되게 두 개의 문(냉동고와 냉장고) 모두에 비스듬한 사선(斜線)으로 줄이 걸쳐져야 할 것이므로 줄의 길이로 가운데쯤 이 걸쇠의 반대쪽 끝의 동그란 구멍에 위치하게 길이를 잡아 준 후 적당한 길이를 남기고 잘라내었다.
잘린 양쪽 끝단을 냉장고 수납장의 왼쪽 벽면의 상하에 각각 위치하게 붙여 놓은 후 반대편인 오른쪽 벽면 중앙 부근에는 걸쇠를 걸어줄 고리를 고정시키는 일로 작업은 마무리시켰다.
생각했던 대로 완성된 걸쇠 고리를 보며 뒤치다꺼리를 마치고 정식으로 걸쇠를 고리에 끼워 넣어본다. 보기에는 좀 그렇지만 능률로서는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멋진 잠금장치가 탄생된 것 같다.
이제 어지간히 심한 북태평양의 롤링이 찾아온다 해도 내 방의 냉장고는 더 이상 제 멋대로 자신의 문들을 열어주어 내가 원하지 않는 난잡한 방바닥 파티를 벌리는 불상사만큼은 피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