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지게 넘긴 비상상황
이제 세 시간 정도 더 달려가면 'J' Buoy에 도착할 예정을 가지고 있어, 마지막 점검을 하며 곧 브리지에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분주한 발자국 소리가 복도에서 나더니,
-조타기가 말을 안 듣습니다.
초조한 걸음걸이로 내 방앞을 찾아온 실항사가 숨 가쁘게 뱉어내는 말이다. 얼른 창밖으로 눈길을 돌리니 선수가 왼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모습을 보인다. 바삐 일어나 복도로 나서니 일부 조명등이 꺼져있는데 기관의 움직이는 진동은 여전히 남아 있다. 급히 브리지로 뛰어 올라간다.
배가 한창 왼쪽으로 돌고 있는 풍경에 창밖에 있는 밴쿠버 섬의 먼산 실루엣이 주마등처럼 돌아가고 있다. 시침이 1530시를 가리키고 있다.
조타기가 고장이 났구나! 하는 생각에 한심스럽기는 하지만, 아직은 JUAN DE FUCA 해협(주*1)에 들어서기 전이라서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부터 가지며 한숨을 돌리는 내 여유에 스스로도 놀라고 있었다.
뒤쪽에서 우리를 쫓아 따라오고 있던 배가 선수 쪽에서 보이는 상황으로 변한 것을 보니, 당황하면서도 또 다른 사고가 우려되는 맘이라 얼른 그 배를 불러 우리를 피해서 지나가도록 알려준다.
그리고 흥분하여 일을 그르치지 않도록 심호흡을 하여 마음을 다시금 가라 앉혔다. 조타기의 고장이지만, 기관을 사용하여 안전한 넓은 곳으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기 위해, 엔진을 정지하면 혹시 다시 사용 못할 것에 대비하여 세우지 않고 전속 항진에서 미속 전진으로 속력을 내리는 조처부터 하였다.
이어서 -비상조타 부서 배치 붙어!- 비상 명령을 발령하여 평소 훈련한 대로 비상조타를 실행할 수 있게 하여 선수를 좀 더 외해 쪽으로 향하게 돌려주었다.
왜 무엇이 고장이 났는지를 알려주지 못한 채 기관실에서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동안 오던 길을 돌아서 뒤쪽으로 선수를 둔 상태로 비상 조타를 실시하여 충분한 육지와의 거리를 확보를 확인한 후 기관을 정지시켰다.
기관실에서 차분히 따지기 시작하여 원인을 찾아내었으며, 임시 조치로 고쳐나가는 과정에서 TOFINO TRAFFIC에서는 계속 우리를 호출하여 왜 무엇이 문제인가를 물어온다.
정확한 원인을 모르며 고치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를 모른다는 황당한 이야기는 해줄 수가 없지만, 그래도 선내 직류 계통의 배선 라인에 이상이 생겨 고치는 중이라고 통보해 주었다.
중간에 다시 한번 파워가 나가는 어려움을 딛고 21시쯤에 고장 난 직류 배선을 MF/HF용 DC CHARGER를 통한 배선으로 바꿔 넣어주니 죽었던 주기관을 위한 직류 계통의 계기가 모두 살아난다.
주된 원인은 알아낸 것이지만 당장 본선 자체의 완전 수리는 불가한 일이다. 임시 조처한 상태로 입항하여 육상의 지원으로 원인 개소의 수리를 해야 할 일이다. 다른 곳들도 하나하나 점검하여 더 이상의 결함이 없음을 확인한 후 엔진의 시동을 걸었다. 단번에 엔진 걸리는 소리가 반갑다.
일곱 시간을 어찌 보냈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초조한 마음 가운데 보내면서 거의 대드쉽이 될 뻔한 상황에서 겨우 탈출하여 아직도 조마조마한 마음이지만 이제 입항을 결행하기로 한다.
고장 난 장소가 외해이고 시간도 밝은 낮이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는가? 게다가 날씨마저 잔잔해서 비록 고장이야 나서 고생했지만 더 이상의 어려움이 없게 된 것만 해도 고맙고 감사한 일이다.
그동안 회사와 대리점, Traffic Center 등과 연락하여 본선의 상황을 파악시킨 상황에서 이제는 입항을 하겠다는 뜻을 알리니 조금 기다리라는 연락이 온다.
수로를 캐나다와 같이 공동 관리하는 미국 측에서 수로 안에서의 재차 고장에 대비하여 예인선을 준비하겠다는 뜻을 보내오며 기다리라는 결정을 해온 것이다.
들어와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졌다. 수로를 항행하며 고장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을 가지고 엔진을 걸어 입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JUAN DE FUCA 수로의 입구인 “J” 부표에 도달하기 한 시간 전이되는 새벽 한 시경 선명이 “BARBARA FOSS"라고 하는 TUG BOAT로부터 연락이 왔다.
대리점을 통해 이야기를 들은 대로 수로 내에서 우리를 ESCORT 하여 투묘 예정지인 CONSTANCE BANK 까지 따라나선 미국의 시애틀 해상안전 사무실에서 강제 배선 배치해 준 터그보트이다.
수로에 들어서면서, 우리 배의 1-2 마일 전방에서 선도하듯 앞서 갈 것을 요구하였다. 그 배의 속력을 감안하여 우리 배 속력을 약간 내려주며 뒤를 따랐다.
아침 7시 30분경 VANCOUVER TRAFFIC과 연락을 하여 CONSTANCE BANK의 북동쪽 끝자락의 바로 그들이 지정해 준 정확한 위치에 8시 30분에 정밀 투묘(주*2) 하였다. 그곳은 주위보다 조금 낮은 수심을 가지고 있는 곳인데 기왕지사 늦어지는 상황이라면 정밀 투묘를 하여 지시받은 정확한 장소에 닻을 내리리라는 오기 같은 뱃장으로 투묘하려다 보니 시간은 한 시간 가량 걸린 것이다.
그때까지 밤새도록 앞장서서 따라왔던 터그보트 <바바라훠스호>는 투묘를 끝낸 우리를 보고 8시 30분에 자신의 임무가 끝났음을 알리며 떠나갔다.
사실 우리의 투묘 위치는 엄연히 캐나다의 영토이니, 미국의 국기를 올린 배로서 우리 배에 ALONGSIDE를 할 수는 없는 일이라서 그랬을까? 밤새 우리 배를 에스코트 해준 예인선 사용에 대한 서명도 안 받고 떠나간 것이다.
10시 50분 캐나다의 COAST GUARD OFFICER 두 사람과 수리기사 두 사람 대리 점원 한 사람 그리고 회사의 미국 포틀랜드 주재원 한 사람 등 여섯 사람이 올라오는 통선을 맞이한다.
현문 사다리 맨 아래 계단 끝에서는 일항사가 내려가서 맞이하게 하고, 나는 현문 앞에서 근무 복을 입고 마중 나와서 일일이 올라오는 사람들과 악수를 하며 인사를 나누는 영접을 했다.
-아! 일이 잘 풀릴 것 같다.
그런 분위기와 예감이 그들을 맞으며 절로 든다.
캐나다 코스트가드의 Senior Surveyor로 올라 온 사람은 영국의 기관장 면허를 가지고 있고, 또 한 사람은 캐나다 선장 면허를 가진 캐나다 사람(백인)들이었다.
선임자는 기관장 출신의 검사관으로 풍채가 단아하고 우아한 은발을 가진 신사로 그냥 이야기를 하는데도 절로 품위를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고장 난 곳을 수리기사들과 둘러보는 동안 나는 선장 출신 서베이어에게 서류검사 및 필요한 PSC 검사를 수검하였다.
그들의 검사하는 태도는 지금껏 이곳에 기항하며 받았던 PSC의 다른 검사관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점잖음과 여유를 가지고 대하여 주니, 수검자라는 강박관념을 벗어나 아주 편한 마음으로 받을 수 있었다.
갑판 계통에는 따로 지적 사항도 없이 끝이 났고, 고장 난 곳을 위주로 검사한 기관 팀도 어느덧 끝나 있었다.
불가항력적인 고장(사고)이 발생했지만, 그 응급 처치를 멋지게 하여 본선을 살려내었다고 현장을 둘러보고 본선의 조치를 칭찬하면서, 함께 올라온 그곳 빅토리아의 조선소 수리기사의 의견을 참작하여, 본선이 출항 전 완전 수리를 하고 떠난다는 조건을 달아서, 그곳 CONSTANCE BANK의 투묘지에서 짐을 싣게 되는 ROBERTS BANK 까지 직행하는 항해 허가서를 내주었다.
그리고 미국 측-US COAST GUARD-에게 자신이 조치한 결과를 통보해 주는 전화를 걸었는데 상대방에서 무엇인가 자꾸 물어와서 긴 통화로 이어지고 있다.
미국 쪽에서는 왜 그렇게 쉽게 움직이게 허가를 해주었느냐는 식의 힐난하는 투의 말을 해오는 눈치인데, 자꾸 길어지는 통화에 나중에는 화가 난 음성으로 대꾸하며 자신의 뜻대로 한다며 끊는 모양이다.
USCG가 너무 간섭이 심하다며 불평 어린 표정으로 나에게 말을 해주는 그 기관장 출신의 검사관과 대화를 하며, 미국과 이웃해 있는 미국보다 국력이 약한 나라가 받게 되는 보이지 않는 갈등을 어렴풋이 읽는 느낌이 든다.
밴쿠버라는 육지의 큰 도시를 두고도 BC 주의 州都를 오히려 밴쿠버 섬의 남쪽 끝에 있는 빅토리아라는 작은 도시에 둔 이유를 들었던 기억도 얼핏 떠올랐기 때문이다.
웃으며 들은 말이었지만, 미국에 밴쿠버 섬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단순한 뜻이 그런 결정에 숨어 있다는 것이었다. 꼭 그런 거라 믿기지는 않았지만, 캐나다 측의 정서가 그렇다는 짐작은 할 수 있었던 말이었다.
전화를 끝낸 검사관을 위시하여, 승선했던 사람들은 볼 일이 끝났다며 웃는 얼굴로 인사하며 배를 떠나간다.
이제 더 이상의 지체 없이 그대로 적하 지에 가서 짐을 실을 수 있게 떠나는 일만 남고 보니, 결과적으론 잉글리시 베이에 가서 검사한다던 예정도, 여기서 시행하면서 까다롭게 예상했던 검사로 인한 늦어진 사항도 없는 그야말로 전화위복의 결과가 마냥 고마울 뿐이다.
단지 새벽부터 계속 7시간 정도 달고 다녀야 했던 TUG의 사용료 일만 삼천 여 달러가 가욋돈으로 지불돼야 하고 이곳에서의 수리비가 지출되는 일이 손해일까?
1445시 도선사가 승선하여 로버츠 뱅크를 향해 떠났고 1930시 접안을 하였다. 그리고 하역과 더불어 수리도 시작되었다.
주*1 : 환드퓨카해협 (Juande Fuca Str.)
길이 약 150km, 너비 약 30km이다. 미국 워싱톤(州) 올림픽 반도(半島)와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州) 밴쿠버 섬[島] 사이에 있으며, 태평양과 퓨젓만(灣), 조지아 해협을 연결한다. 플래터리 곶(串)에서 태평양을 향해 열려 있다. 태평양 연안의 수심은 90m이며, 해협의 중간은 수심이 275m나 된다. 차가운 태평양 해류가 해협을 따라 흐르며, 남서쪽과 서쪽에서 강한 바람이 자주 불어온다.
주*2:정밀 투묘.
위치를 조정해가며 정확하게 미리 예정해둔 투묘지에 접근 그 자리에 투묘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