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항지를 물러나옴

황천 피항에 만족하며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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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별 다른 선체 진동 없이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아, 아직도 바람이 불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생각하며 올라간 브리지에서 바람은 이미 35노트를 넘나들며 불기 시작했고, 엔진은 그대로 미속으로 돌고 있는데 3노트를 오르내리던 속력만이 0.5노트에서 내려갔다 올라왔다를 반복하고 있다.

지금 이 정도의 바람을 피항지인 해협이 아닌 외해에서 만났다면 제법 크게 높아진 파도를 만나게 될 터인데 아직 여기의 바다는 크게 일어나지 않아 역시 피항을 결행한 보람을 여실하게 느낀다.


이런 날씨를 보고 폭풍 상황이 조용하게 지난 걸 보니, 그냥 속항 하여 갔으면 좋았을 걸 괜히 기다려서 시간만 축낸 게 아니야?라고 생각한다면 큰 잘못된 평가를 갖는 일이다.

우리가 그대로 진행해서 갔더라면 지금 쯤 그 자리에서 만나게 되는 것은 더 강한 바람과 높은 파도였을 것이고 배도 사람도 만신창이의 몸이 되어 축 쳐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서 날이 밝아야 마음의 초조함이 좀 가라앉지 아무래도 어둠 속에서 보이지 않는 상황을 귀의 감각으로 풀어내려니까 괜스레 초조하고 걱정스러운 심정이 되어 불안이 제 먼저 꼬물거리며 들어서려 한다.


지금부터 밥 두 끼니를 때우고 나면, 아마도 저기압은 가장 가까이 우리 배에 다가선 상태 일터이고, 그때면 우리 배는 이곳을 떠나야 할 시점이 되는 것이라고 예정을 다시금 확인한다.

바람의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있는데 어제 미국 코스트가드의 VHF 기상방송으로는 45노트의 바람까지도 이야기가 나왔으며 오늘 아침이 피크인 것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11시가 되었다.

선수를 돌려 다시 떠나려고 작정을 하고 기관실에 연락을 하니 곧 된다던 준비가 무엇 때문인지 늦어지는 것 같아, 아예 점심 식사를 마친 13시에 떠난다고 다시 이야기를 해주고 내려와 식사를 한다.

KS Weather에서 13시에 출항하도록 추천이 왔다는 연락이 브리지에서 온다.

밥숟가락을 빨리 놀리어 얼른 식사를 끝내고 브리지에 올라가 즉시 출항이 되도록 준비시켰다.

엔진의 파워를 올리고 기름은 다시 연료유로 바꾸도록 지시하고 선수를 돌리기 시작한다.


포올 텐!(Port Ten)의 구령에 키를 왼쪽으로 10도 돌렸는데도 아직 돌아갈 마음이 없으니 기다리라는 식의 태도라도 취하는 것 같이 배의 선수는 움직일 생각을 도통 못 하고 있다.

좀 더 타력을 주기 위해 이번에는 포올 트웬티!(Port Twenty)라는 구령을 내리고 기다리니 이제 겨우 조금씩 돌기 시작하는데 완전히 180도를 돌아 꽁무니 쪽이었던 곳으로 선수를 보내야 하는 형편에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면 시간 깨나 걸리겠다는 초조감에 기관을 빨리 Sea Speed로 올려주지 않아 배가 도는 게 늦어진다는 생각까지 들며 기관실에 대한 유감이 생기려 한다.


20 여분이 걸려 완전히 돌아 220도의 침로를 잡아 달리기 시작하니 이번에는 바람이 떠나기 전에 30 knots 하던 것을 오히려 더욱 높이어 40 knots 까지 보태고 있다.

뒤에서 부는 바람에 뒤에서 오는 파도라 괜찮기는 하지만 그래도 워낙 세게 불면 속력에도 마이너스 영향을 주기에 이젠 그만 좀 불어 달라고 간청하고 싶은 심정이다.


어쨌거나 황천 피항지를 벗어난 항해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는 마음이 들게끔 순조로운 도움을 주는 항해로 들어서니 편한 마음으로 미뤄두었던 공문을 펼쳐보기로 한다.


그 공문들 중에서 내년 1월 1일부로 진급하는 사람들의 명부가 있었는데, 우리 배에 타고 있는 승조원 중에 거기 들어간 사람이 두 사람이나 된다.

그걸 축하해 준다는 이유를 달아, 어머니 팔순 생신 때나 한 잔 할까? 하고 참으며 마시지 않았던 술이지만, 한 잔 하기로 한다.

그러고 보니, 식사를 하며 내친김에 그간 금주하고 있었던 마음에서 벗어나니. 과음에는 도달치 않으려고 작정하고 마시지만 그간의 긴장감이 풀리며 편안한 마음이 된다. 사람들이 어려울 때일수록, 술에게로 도피한다는 이야기도 살짝 수긍이 간다.


곤두서 있던 기분이 좀 사그라지면서, 앙금처럼 남아있던 불안감마저 그 한잔의 술로 인해 기분이 풀어지며 다 좋게 해결되었다고 믿게 만든다. 참 좋은 술의 조화 이기도하다.


왜 사람들이 기분이 우울할 때나 어쨌든 기분이 평화롭지 못할 때에 기분을 좋게 만들어 보려고 술을 마시게 되는지 그 사람들의 기분을 알 것 같아지며, 지금껏 왜 그런 일에 매달려 그렇게 고생하고 남 앞에 힘들어 보이는 모습조차 보이고 있었을까 하는 후회하는 마음조차 생겨나려 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술 취한 사람으로 보게 한다는 일, 그건 결코 바람직한 행동이 아니라 여겨지기에, 그 정도에서 술잔의 비움을 끝내기로 한다.

어쨌거나 순조로운 피항 완료를 축하하는 한잔의 술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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