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
모처럼 편안한 기분으로 잠자리에 들어 오랜만에 숙면을 취하였다.
기대했던 대로 저녁에는 계속 뒤바람이었다. 그렇기는 해도 세찬 바람에 떠밀리며 달리기에 휘이익 거리는 바람 소리는 한 번씩 귀에 거슬리는 형편으로 남아 주곤 한다.
새벽에 눈을 뜬 시간에는 배가 약간 흔들리긴 하지만 조용하여 바람이 잔 것을 알겠다. 살며시 들쳐 본 창 가리개의 벌어진 틈바구니로 바다의 파도가 확인되기 전에, 진짜 보석보다도 더 빛나는 하늘의 별들 모습이 먼저 눈에 들어 안도의 한숨을 마음 놓고 내뱉아 본다.
오리온 좌의 별들이 오래간만에 창의 한가운데에 들어있어 한참을 보다가 선수 쪽으로 눈을 내려 깔아주니 희미한 하늘과 수평선의 맞닿음이 보이며 그 안에 희끗거리는 티 하나 없는 매끈한 바다가 검은 비로드를 펼쳐 놓은 듯 보여주며 다가 올 아침을 예고하고 있다. 바람은 이제 모두 지나 가버린 것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브리지에서 아침의 찬란한 태양이 떠오르는 걸 구경한다. 뿌려지는 따뜻한 햇살을 즐기면서 받아 놓은 기상도를 확인해 본다. 확 뻗쳐진 전선이 새롭게 생겨 있어 오후에 들어서면 다시 구름을 불러 모으고 서서히 날씨를 어둡게 할 기미를 엿 보이게 한다. 그러니 지금 현재 환하게 비치는 태양이 더욱더 값져 보이고 따뜻하게 여겨진다.
열 시 삼십 분. 256도 침로로 일차 유니막 패스를 향한 변침(주 1*)을 해줄 때에 이미 변덕꾸러기로 소문이 난 이곳의 기상은 회색으로 변하여서 빗방울을 흩날리기 시작한다.
이제 60 마일을 달리고 난 오후 네 시 30분쯤이면 유니막 서쪽 입구를 향한 두 번째 변침이 있겠고, 밤 22시 30분 경이면 유니막 패스 서쪽 입구를 빠져나오면서 본격적인 서진이 시작되어 내일 아침 8시면 유니막 패스를 모두 빠져나가 베링 해에 들어설 것으로 예정을 세우고 있다.
평균 시속 10 knots로 잡은 예상인데, 빨리 그 변침 시간이 왔으면 기다리는 심정이 되는 것은 혹시 그 시간 안에 선속을 저하시키는 나쁜 기상의 악화가 있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이다.
가까이 오고 있는 저기압은 우리 배의 그런 움직임에 별 큰 영향은 주지 않고 제 갈 길로 가게 될 것으로 예상하지만 그건 그렇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앞장서며 세워본 예상이기도 하다.
22시경이면 바람이 수그러질 것이란 예상을 하는 KS Weather의 조언과는 달리 수그러들지도 않았지만 현저하게 세어지 지도 않은 바람이 계속되며 한 번씩 선수에 하얀 물보라의 꽃을 피워주어 279도로 변침 한 후에 옆으로 파도가 쳐올까 봐 걱정을 하느라 잠도 못 자고 있었다. 마침 회사의 담당 감독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같으면 기분 좋은 소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의 연가 하선에 관한 이야기도 해왔는데 현재 갖고 있는 감정이 변덕스러운 날씨로 인해 편하지가 못하니 나의 전화 응대가 좀은 무뚝뚝하게 들렸던 모양이다.
황천에 관한 이야기로 호주만 계속 다니면 훨씬 좋을 터인데, 힘들게 캐나다를 가게 되었다며, 전화를 자주 걸지 못하는 것도 황천을 맞는데 대한 도움도 못 주어 미안하기 때문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곁들여 내놓는다.
사실 호주만 기항하는 점에 대해서는 감독의 입장으로도 어쩔 수 없는 권한 외 의 사항이다. 어쨌든지 미안한 감정을 보이는 음성으로 계속 수고를 부탁한다는 말을 들으며 나도 걱정 말라는 이야기로 상대방의 호의에 고마워하는 응수를 보내주었다.
교대자로 나서 준 릴리프 선장은 H 선장이란다. 입항 지원 서류나 좀 빨리 보내주었으면 하는 부탁도 중간에 삽입하며 통화를 끝낸 후, 새로 받은 기상도를 확인하러 다시 브리지로 올라간다.
받아 든 기상도에 우리가 위치하는 유니막 입구에는 전선이 걸쳐져 있어 바람을 예상하지만 그 전선을 주도하는 저기압이 지금은 죽어가고 있는 저기압으로 크게 센바람은 이미 없어진 것인 데도 이렇게 부는데 더 이상의 풍랑으로는 커지지 않겠다는 믿음을 보여주니 다행이다.
밤 열두 시 당직 교대 차 올라온 2 항사에게 유니막 입구에 들어선 위치를 확인시키며 우현 쪽으로 변침 하도록 지시한다. 이제 유니막 패스를 모두 빠져나와서 베링해의 남부 중앙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침로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선수가 돌아가는 걸 확인하며 다음의 코스는 279도이지만 밀리는 걸 감안하여 270도로 침로를 잡도록 조절해준다.
걱정했던 횡요가 그렇게 생기지 않고 잘 달리고 있어, 안도의 가슴을 쓸어내며 방으로 내려온다.
그래도 이런 날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따라 중얼거림으로 들어서는 기도의 문구가 편안한 침 삼킴을 입안에다 남겨주고 있다.
주 1* 변침 : 침로의 변경. 배는 목적지를 향한 항해 중 컴퍼스의 정해진 방위 도수로 선수(침로)를 유지시켜 똑바로 가게 하는데(침로의 정침) 필요에 따라 이 정침을 다시 변경해 주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