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진감래의 뜻이 새삼스럽고
내 혼자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자연의 횡포에 대해 일방적인 견제만을 당하며 속수무책으로 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의 고독 속에서 그래도 나와 똑같은 입장을 가진 타선을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어떤 면에서는 동료의식을 갖게 만들어 주며 결코 혼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어 위안받게도 한다.
한 번씩 흔들어 주는 파도 밭에 휩싸일 때마다 마음 졸이며 기우뚱 거리며 달리고 있든 우리 배 뒤에 우리 배 보다 약 1 knot 정도 속력이 빠른 배가 레이더 상에서 꾸준히 따라오는 게 보이고 있다.
잠시 후 더 멀리 뒤에서 또 다른 점으로 레이더스코프 상에 나타난 아주 빠른 속력의 배가 유니막 패스를 같이 서진 하자는 듯 역시 부지런히 쫓아오고 있다.
역시 배들이 잘 다니는 길목이다. 그동안 모습을 볼 수 없었던 배들이 이렇게 적당한 간격을 두고 나타나 힘이 부쳐 하던 마음을 위로하며 북돋우는 일을 해주는 것이다.
맨 뒤에 있던 배는 속력이 17 knots인 것으로 보니 컨테이너 선박으로 추측되는데 기분에는 순식간에 우리의 옆에 도착할 것 같이 빠르게 따라붙으며 어느새 추월을 시작한다.
제법 큰 컨테이너 선박으로 배 위로 올라온 파도의 피해라도 찾아보려는지 갑판 상에 불을 환하게 켜서 항해등 이외의 몇 가지 불빛도 더 보이고 있다. 이런 파도 밭에서도 17 knots의 속력으로 움직이는 그 배가 부러운 것은 인지상정. 우리 배가 평소 자신이 내던 속력이나마 제대로 유지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되씹으며 그 배의 멀어져 가는 불빛을 아쉬워하며 방으로 내려왔다.
다시 두 시간이 더 지난 새벽 네 시 이십 분. 흔들림에 불안 초조한 마음에 도저히 잠잘 수 있는 기분이 아니라 기상도라도 확인해 보려고 다시 올라간 브리지에서 우리 배보다 겨우 1 knot가 더 나가던 배가 우리의 왼쪽 옆에 붙어 서서 힘겨운 따라잡음을 하는 현장과 만나게 되었다.
항해등으로 짐작할 수 있는 배의 모양새와 크기가 우리 배와 같은 CAPESIZE BULKER인 모양이다.
반 마일의 폭을 거리로 두고 지나치려는 그 배가 추월하는 동안은 파도와 바람막이로 우리의 왼쪽에 있어 주는 것 같아, 그만큼 파도가 마름질 당해 우리 배에 흔들림을 덜 치게 만드는 것 같은 느낌도 가지게 한다.
그것은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에 라도 매달려 보려고 몸부림치는 듯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성향으로 이해해도 될 느낌이겠지만...
힘들게 버티며 좁은 해역을 빠져나와 알류샨 열도 섬들이 줄을 이어 병풍처럼 둘러서 있는 베링해로 진입하니, 지금껏 불어오던 남풍을 자연스럽게 섬들이 막아주어 바다를 그냥 잔잔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다. 참고 견디면 좋은 시간이 온다는 옛이야기가 결코 틀리는 말은 아닌 모양이다.
-누가 장풍(掌風)을 날려서 이렇게 조용하게 파도를 잠재웠지?
손을 들어 바람을 보내는 시늉을 하며 농담까지 던지는 여유를 부려본다. 그리고 GPS 에 나타나 준 선속을 보니 어느새 12.7 knots로 빨라져 있다.
새벽 내내 8 knots 정도의 속력만이 났을 때에는 다음 코스로 이어지는 지점까지 도착하는 걸 15시로 예상했는데 지금같이 가면 다시 12시 도착으로 단축하고도 남겠다.
잠도 못 자고 초조했던 기분이 좋아지는 쪽으로 돌아서긴 했지만 좀 더 부리는 욕심은 날씨마저 쾌청하게 개어 주었으면 하는 바람까지 꿈꿔보는 것이다. 말 타면 견마(牽馬) 잡히고 싶다든가 그런 류의 생각 일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