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항사는 항해장인데...
GMT 9일 12시(배의 지방시로는 9일 01시)에 남쪽에서 쳐오는 바람과 너울이 보퍼트 스케일 8 정도의 세력으로 아홉 시간 정도 영향이 있을 것이란 예상이 KS WEATHER에서 전해왔다.
제법 흔들리겠다는 민감한 반응은, 밤중이 되어서도 취침에 들기는 애초부터 틀린 일 일터이니, 아예 잔잔한 초저녁부터 미리 잠을 자두자는 생각에서, 엊저녁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었었다.
요의(尿意)로 잠에서 깨었다. 시간은 새벽 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으나 별다른 흔들림도 없이 배는 조용히 항해하고 있어 예상 정보가 틀려지고 있다는 어쨌든 반가운 상황에 안도부터 한다.
새벽 4시 40분이 되었다. 이 정도의 시간이면 이미 수신이 끝났을, <새벽 1시 기상도>를 보기 위해 침대에서 일어나 방을 나서서 브리지로 향한다.
선내 사관 사무실 앞을 지나치는데 문은 꼭 닫혀 있건만, 아무래도 안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져 누가 이 새벽에 깨어 있나? 확인하려고 열어 본다. 이항사가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 카드 게임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이미 밤 새운 한밤중의 항해 당직(0시-4시)을 치러낸 당직이 끝난 지금은 아침밥조차 걸러 가며 11시 넘도록 까지 잠을 자 둬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 이항사인데, 저러고 있으면 결국 날밤을 새워 보내는 일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그간 몇 번을 당직이 끝난 후의 그와 맞닥뜨리며 비디오를 보던 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모습을 만났던 기억이 되살아 난다.
-왜 또 잠을 안 자고 그러고 있어? 빨리 자도록 해
말을 걸어준 후 브리지로 향했다. 그리고 이 친구가 이런 식으로 잠을 안 자고 있었던 때는 거의가 날씨가 별로 좋지 않은 날이었다는 공통점을 떠 올려 본다.
나의 경우로 생각해도 황천인 날은 방에 들어가 잠을 자려고 해도 일종의 공포감 비슷한 초조감이 생겨 침대에 누울 생각이 별로 안 난다.
할 수 없이 자야 한다면 옷을 입은 채로 소파 같은 장소에 누워 억지로 잠을 청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도 안 되면 아예 잠을 포기하고 무슨 다른 일에 열중하려고 했는데 짐작하건대 2항사도 그런 침대 기피 증세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이 게임을 하고 있는 모양이 아닐까? 절로 그런 추측이 든다.
나야 선장으로서 배의 안전항해를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행동해야 하니 그런 식의 행동이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이라 치부해도 되겠지만, 이항사가 벌써부터 그런 상황에 빠져 있다는 건 별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 여겨진다.
브리지에 도착하였다. 당직 중인 일항사의 인사를 받으며 방금 이항사를 만났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사무실로 내려가 아직도 이항사가 그곳에 있으면 즉시 방으로 가서 쉬라고 이야기해주도록 지시했다.
이항사의 당직 상황에 대해 좀 더 관심을 가지고 계속 관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어 우선 새벽 당직이 끝나면 즉시 잠을 자도록 하는 일부터 제대로 이행하도록 감독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고 보니 항해사들이 당직 중에 해도 상에 그려 넣어준, 배가 지나온 위치를 확인해 보니, 다른 당직사관의 시간대에는 적어도 30분에 하나 정도의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데 유독 2항사만은 그리하지 않고 있었다.
통상적인 항해장 임무도 갖고 있는 이항사 직책인데, 그의 당직 시간인 00시에서 04시 사이에 요 근래 번번이 아무런 선위(船位)를 그려 넣은 흔적이 없는, 빈 코스라인 만이 그어져 있고 , 겨우 당직 교대 시간에만 한 개 그려진 걸 보며, 당직 시간 내도록 무엇을 했는지도 의심이 들 정도이다.
쉬는 시간에 잠을 안 자고(아니 못 자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 버티다가 당직에 임하여 졸음이 온다면 어찌 될 것인가?
짐작하긴 싫지만 거의 모두가 깜빡 졸게 되거나, 더하여 아예 소파에라도 누워 잠을 자려는 의도를 보이는 당직사관도 지금까지 여러 명을 보아왔다.
당직 중 임의로 행하는 취침 상황.
그 결과가 어떤 일을 유발할 수 있는지를 상상해 보면, 이것은 개인의 잠을 자는 것에 대한 불편한 간섭이 아니라, 배와 승조원 모두를 위한 안전조치로서 꼭 필요한 지시이고 지도인 것이다.
이항사를 침실로 돌려보내라는 지시 사항을 이행하러 일항사가 브리지를 내려간 사이 푸로팅 시트에 달랑 한 번만 그려진 이항사의 04시 교대 위치를 다시금 확인하며 수신해 놓은 기상도를 펼쳐 든다.
기상도는 베링해의 서쪽 반을 차지하고 967 hpa의 중심을 가지고 위쪽으로 움직이지만 이제는 소멸의 길을 밟고 있는 저기압을 보여주고 있다.
어쩌면 소멸되고 묻히게 될 장소를 찾아 떠돌고 있는 코끼리의 생애를 닮은 듯싶은, 저기압이지만 그 몸체의 오른쪽 반원을 아직까지는 우리 배 앞에 두고 있는 형편이라 앞바람은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기상도의 모습을 해석한다.
항로 추천사의 예상이 조금 달라진 것이 오히려 우리 배에는 좋은 현상임을 확인했으니, 지시했던 일을 마치고 올라 온 일항사를 다시 교대해주고 방으로 내려왔다.
오후에 들어서며 당직(12-16시)에 들어간 이항사를 찾아 점심 식사 후 브리지로 올라갔다. 그리고 당직 중에 해도에 왜 위치를 제대로 그려 넣지 않았는가를 물었다.
돌아온 대답이 해도에 위치를 그려 주기에는 너무 좁아서(스케일이 작은 해도라 한 당직 간의 거리가 아주 짧게 나타난다.) 그랬다는 이유를 대었고,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DGPS의 위치가 잘 나오니 그것을 보면서 그대로 가감해 사용하면 편한데 구태여 해도에 위치를 넣어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아서 그랬다는 대답을 한다.
첫 번째 이유는 PLOTTING SHEET에다 위치를 그리는 것도 안 한 것을 보고 따지니까 변명을 위해 늘어놓은 이유이고,
두 번째 이유는 그의 생각을 대변하는 것으로서 능히 그런 식으로 할 것이란 감을 잡고 있는 일이다. 요즘의 젊은 사람들이 빠져있는 편리함에 안존 하는 생태로서 기성세대와 세대차를 극명히 느끼게 하는 문제이다.
과학적으로 잘 되고 있는 방법이 있는데 왜 구태의연한 옛날 방식을 고수하며 힘든 곁가지 일까지 하느냐? 하겠느냐! 해야 하느냐?라는 사고방식의 표출인 것이다.
그러나 현대 전자 방식의 모든 기계가 총망라되어 있다시피 하는 배에서 예전 방식을 아직도 버리지 않은 채, 그 사용 방법이든가, 취급을 위한 교육도 계속하고 있는 진정한 이유를 젊은 사관들은 이해 못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발달한 전파 전자 항법만을 터득하여 항해에 임하면 다 해결되는 것을 구태여 지문 항법이나, 천문 항법을 같이 사용하는 것은 불필요한 시간과 자원의 낭비라고 그들은 믿고 있어 보인다.
그러나 꼭 그럴까?
전쟁을 할 경우, 현대전이기에 아무리 전자전으로 승리를 장악한다 해도 갖춰야 할 마지막 최후의 승리는 보병의 진지 점거가 있어야 끝나는 게 아닐까?
비록 과학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전자 항법 체제이지만 사용 중에 흔들릴 경우, 예를 들어 전원이 차단된다든가, 또는 이 일을 위해 쏘아 올려진 인공위성에 극단적인 고장이 발생한다면, 이 체제는 허무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지문 항법이나, 천문 항법 등은 작은 제약은 있지만, 극단적인 제약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옛날로부터 이어져 온 방법이니 이를 배우고 익혀두도록 규정하며, 학교 교육의 한 과목으로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교육을 매뉴얼에 따라 본선에서 시행하고 기록으로 남겨둬야 하는 것도 회사가 제정하여 배포하고 있는 SQM 매뉴얼에 따르는 일이다.
이항사에게 조용히 따져 물었다.
-SQM을 제대로 실시하고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확인하는 방법은, 기록해놓은 것을 검사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것인데, 실제로는 아무리 잘 하고 있어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면 알아낼 길이 없지 않으냐?
-자네가 아무리 적당한 시간을 두고 위치를 확인하여 침로를 보정해주었다고 말해도 그런 상황을 믿어 줄 근거가 없으면 인정이 안 되는 것이다.
-당직 중에 실시한 해도상 위치 기록이 없다는 것은 당직을 제대로 서지 않았다는 증거는 될지 언정, 역으로 다른 방법으로 당직을 잘 서고 있었다는 걸 증명하는 일은 결코 될 수가 없다.
-앞으로는 그런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당직 중에 해도상 위치 표시는 빼먹지 말고 측정 실시해야 할 것이다.
-예, 잘 알겠습니다.
이항사는 시원한 대답을 한다.
그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어주면서, 내가 가진 옛 기억을 기쁘게 반추해 본다.
나쁜 기상상황 하에서 위치도 모르고 추측 항법(Dead reckoning)만으로 며칠을 계속 항해하다가 마침 맑아진 날씨와 함께 찾아온 태양과 별을 섹스탄트 거울 위에 올려놓고 찾아낸 위치를 계산해 그려 내었을 때 가졌던 희열과 기쁨은 곧 항해사가 된 것이 그야말로 보람찬 세월이었음을 기분 좋게 확인 받은 일이었었다.
그들-요사이 젊은 사관들-은 모르고 있으니 그런 일을 하는 자체가 귀찮고 힘든 과외의 일 일수밖에 없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