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도 밭에 누우려는 선체
북태평양의 거친 바다를 너무 안이하게 대처하고 있었다고 타박을 주는 걸까?
KS Weather의 통보대로 새벽부터 바람이 시작되는데 걷잡을 수 없이 풍력이 올라가 순간적으로 70 knots에서 최고 80 knots까지 오르내리며 한 시 방향에서 불어 준다.
그에 맞추어 침로를 조종해 주면 또 두 시로 넘어가곤 하여 다시 한 시로 고쳐주다 보니 어느새 223도의 코스가 270도까지 된다. 바람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한 시 방향에서 찾아들고 있다.
새벽 04시의 저기압 위치에서 30 knots로 달린다고 해서 빠르게 멀리 가버릴 것으로 기대를 하였었는데, 점심때 받은 아침 열 시의 위치는 15 knots로 동쪽을 향한 것으로 나타나 별로 멀리 떨어지지 못하였기에 그렇게 나 바람을 만나게 하는 것이다.
우리 배의 오른쪽 뒤에서 러시아 어선이 한 척 우리와 같은 방향으로 항행하는데 속력이 우리보다는 조금 빠르다. 그 배가 2마일 정도까지 접근되니, 자꾸 신경이 쓰여 섬에 가까워지는 현 코스에서 외해로 뽑아내는 침로를 택하기도 할 겸 그 배도 피하려고 배를 돌리기로 한다.
270도에서 좌현 전타를 명령하여 쿠릴열도의 섬을 향해 다가서던 코스에서 과감하게 왼쪽으로 틀어 180도 코스로 가려고 시도하는데, 230도 부근에서 더 이상 돌아 주질 않으니 파곡 사이에 들어 눕는 형태로 된다.
그런 배의 갑판 위로는 서슬이 시퍼레진 바닷물이 마음 놓고 올라와 갑판 위의 기물들을 제멋대로 점검이라도 하듯이 저어 보고는 내려간다.
그대로 있기에는 너무나 위험하고 흔들림이 심해 다시 돌리기 전의 코스로 복귀시키느라 한참을 마음 조리며 지켜봐야 했다.
한 시간 여를 더 달려 이번에는 파도가 좀 숙으러 드는 것 같아 왼쪽으로 돌리는 일을 다시 시도한다.
심하게 흔들리는 롤링을 참으며 달래듯 타를 원위치했다가 다시 좌현 전타를 하니 돌아가기 시작하였고 몇 시간 전까지도 위험해 보였던 230도 선도 쉽게 넘겨주어 180도에 맞춰 놓는다.
그런데 이번에는 너무 많은 해수가 계속 선수를 치고 올라와서 혹시 선수창고에 물이 들어가는 일이라도 생길까 봐 슬그머니 걱정이 든다. 실은 선수창고의 Water tight door 하나가 비틀리어 물이 들어갈 수 있게 벌어진 게 있는데 그걸 임시로 조처해 두고 있기에 걱정의 은근함이 더욱 깊어진 것이다.
열심히 달려 저기압과는 조금이라도 더 멀어진 위치로 가려고 덜 흔들리는 코스인 180도를 고집하여 달리고 있다. 내일이면 다시 원래의 코스로 복귀할 수 있다고 믿으며 기관도 증속 하여 10 knots가 나게 해두고 브리지를 내려왔는데, 한 시간 정도 지났을 무렵인 1440시에 선내 긴급방송의 소리가 들린다.
-기관부 승조원은 이 방송 듣는 즉시, 모두 기관실로 내려와 주세요.
당직사관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바쁘게 브리지로 오른다. 기관을 정지하고 살펴야 할 일이 발생했다며 RPM을 내리고 있는 중이다.
황천 속에서 제일 불안한 상황은 기관의 정지 같은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절로 기도드리게 되는 형편이 되는 건데 하필이면 바라지 않는 그런 일이 지금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불평이나 불만을 표출시키기에 앞서, 우선 날씨의 확인부터 한다.
해가 나와 있고 바람도 많이 잦아든 것 같아 백파가 많이 줄어 있기는 하지만 순간적으로 바람이 불면 아직도 40 knots는 거뜬히 넘기는 상황이다. 하지만 오전에 비하면 많이 수월해진 상태가 마음을 조금 놓이게 만든다.
메인 엔진 6번 기통에서 이상한 음이 발생하여 즉시 정지한 것이며, 열어봐야 원인을 알겠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것 같다는 이야기를 기관장이 한다.
-파도가 아직도 높아, 가능한 엔진을 살린 채 움직였으면 좋겠는데 안 되겠어요?
-열어서 체크를 해봐야 상황을 알겠기에 지금은 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세우지 않는 방법은 기관에 큰 무리를 줄 수 있어 곤란하단다.
1448시 북위 47도 32.5분 동경 153도 25.5분 위치에서 엔진을 세웠다.
점점 들어 드는 타력(惰力)을 마지막까지 이용하여 배를 돌려 선수가 바람과 마주 서게 타를 잡아준다.
그러나 잠깐 그대로 서주던 선수 보침은 타력이 없어지니 그대로 돌기 시작하여 240도에 머무르며 파도 밭에 눕는 형태를 보이지만, 그런대로 횡요에 잘 견뎌주고 있다.
배를 세운 지 30여분이 지나 6번기통 랜턴 스페이스를 개방해보니 불이 난 흔적이 있는데 피스톤 링도 괜찮고 다른 데는 이상이 없어 깨끗이 청소를 하고 다시 속항 해도 될 것이라는 초기 보고를 해 온다.
-정말 잘됐군요. 작업이 끝나는 대로 떠나도록 합시다.
-한 30분 걸릴 예정입니다.
1542시 드디어 청소가 끝나고 기관의 시동이 걸렸다.
-허광호, 5번 6번 온도 얼마야?
일기사의 말소리가 트랜시버를 통해 흘러나오니,
-5번 46도, 6번은 47도입니다.
중국 선원 허광호의 씩씩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통화 내용을 들으니 괜찮은 성싶어 우선 횡요에서 벗어나기 위해 선수를 돌려 180도에 맞추도록 지시한다.
-엔진을 세워도 타이밍이 맞게 되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어요.
-한두 시간 빨리 세웠다면, 파도 밭에 누워 요동치는 위험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으니까요.
겨우 이런 말로 위안을 삼으며 어떻게 쳐올지 모르는 파도가 심한 해역에 추진력을 잃고 있던 그 위험했던 순간을 무사히 넘긴 걸 자축하는 기분이다.
파도 밭에 누워 있든 우리 배로 처량한 눈길을 보내는 듯했던, 하얀 눈을 머리에 이고 싸늘한 한기마저 품어 보이든, 쿠릴열도의 한 섬인 Ostrdva Usihishir의 모습이, 수리가 끝날 즈음하여서는 오히려 구름 속으로 자태를 숨기며 배웅에 참여하질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