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얼마큼 변해 있을까
12,12. 한국 근대 역사상의 중요한 일을 가지고 있는 날짜로 기억되는 오늘이 나에게는 12회라고 졸업 회수로 인연 지어진 Y고교 동기 동창들이 만나는 동창회 날이다.
지하철 선릉역 부근에 있는 어느 결혼식장의 지하 뷔페식당에서 동창회는 치러지고 있었다.
이제는 환갑을 코앞에 두고 바라보는(아니 이미 넘어버린 사람도 있는) 늙은 티가 맴도는 얼굴을 가진 고교 동창들을 만나본다는 생각을 하며 고교 졸업 후 거의 처음으로 찾아간 동창회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우리들을 가르치셨던 은사 한 분과 당시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사진 찍어주는 것을 업으로 생활하던 사진사도 참여하였고, 그분들이 매년 동기회에 옵서버로 참여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선생님이란 직업은 이렇듯 즐거운 노후를 간직할 수 있게 하는 멋진 직업이구나! 하는 감흥이 들며 이해는 되지만, 사진사의 출현은 조금 의외였다. 하나 따지고 보면 그분도 자신의 청춘 시기를 우리와 함께하며 지낸 보람을 이렇게나마 느낄 수 있다는 게 늙고 초라 해진 현실에서 그나마 복 받은 일이라고, 그렇게 해준 동창회 관계자에게 잘했다고 추어주고 싶은 마음도 든다.
3학년 때의 반별로 앉았기에 테이블이 모두 아홉 개였는데 각 테이블마다 앉아있는 숫자는 10명 내외로 결국 90여 명의 숫자가 참석한 셈이다.
동반한 부인들은 우리들 교적에도 없는 10 반을 만들어서 따로 모셨는데, 그 역시 10여 명이 한 테이블에 앉아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자신들의 아내와 함께 모인 사람의 숫자가 겨우 10여 명이라는 게 너무 적은 게 아닐까? 생각하는 심정이다.
평생을 떨어져 산 날이 많은 나로 서야 이런 모임에는 꼭 부부 동반으로 참석해야 한다고 믿고 있기에 당연히 부부가 같이 온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고 있다. 졸업 당시 560 여 명이던 동창 중에 이렇게 동창회에 참석하는 숫자는 고작 6분의 1 정도라는 계산이 절로 나온다.
지나간 세월 안에 이미 세상을 버리고 먼저 떠나간 사람 들,
멀리 외국으로 이민을 가 버린 사람 들,
동창회를 잊고 소식 끊고 살아가는 사람 들,
이들 모두를 두드려 뭉친 숫자가 벌써 전체 졸업자들의 6분의 5가 되었다는 서글픈 숫자의 이미지 역시 우리도 늙었고 세월도 지나갔구나! 하는 영탄(永嘆) 속에 나이는 숫자 일 뿐이란 말을 무색하게 만들고 있다.
속이 별로 좋지 않아서 식사도 술도 적당히 먹고 마신 후 한 시간쯤 지나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한다.
고교 졸업하던 날, 이다음 이렇게 같이 졸업한 동창생들 가운데 나는 어느 정도 이루고 있는 사람들에 속하게 될까? 를 궁금해하며 교문을 나서던 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실제로 지금 내 형편은 어디쯤에 속해 있는 걸까?
잠깐 그때의 기억을 되돌리어 지금을 살피는 기분에 들어서며, 옆자리에 앉아있는 아내를 보고 뚱딴지같은 말을 내뱉는다.
-여보, 내년 동창회 모임에도 또 참석 할거 죠?
차창 밖으로 지나치는 성탄절 분위기를 내다보며 음미하고 있던 아내는 대답은 보류한 채 그저 빙긋이 웃어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