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의 아쉬움을 달래려고
물때에 맞추다 보니 명일 새벽 4시 30분에 도선사가 승선하는 거로 출항 예정이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엊저녁은 일찍이 자리에 들어 잠을 자두는 것이 출입항에 따르는 피곤을 최소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일 수 있는데, 오후 5시쯤에 하역 작업이 끝나 버리니까, 모두들 홀가분한 기분에 들뜨면서 출항 때까지 남아있는 시간을 밖으로 외출하여 놀다가 들어오고 싶어 하는 분위기로 슬그머니 변하고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배에 남아 있지만, 평소 당직 때문에, 또는 선적작업 중에는 배를 비울 수 없는 직책이었기에, 신경 쓸 작업도 없겠다 한량한 마음이 드는 형편이 되고 보니 더욱 나가고 싶은 욕구를 어쩔 수 없이 표출시키며 서성거리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더하여 밖에 나가면 스러트 머신으로 돈을 딸 수 있는 게임도 할 수 있으니 그런데 소질을 갖고 태어난(?) 사람들은 특히 안달을 내면서 나가려는 눈치를 시위하고 있는 거다.
개중에는 어제 나가서 잃고 들어온 사람도 있어 오늘은 복수의 승리를 할 수 있다는 새로운 믿음을 만들어 가지고 아예 공개적으로 나가겠다는 시위마저 하는 사람도 있을 정도다.
나야 그런데 취미가 없는 건지 그런 곳엘 가도 게임기 앞에 앉지 않고도 견딜 수 있으니 외출에 참여 안 하고 새벽 일찍 출항에 대비한 잠이나 일찍 자 두려고 했지만, 반 정도의 승조원들은 그런 저런 이유로 저녁식사 끝나기가 바쁘게 외출을 감행하고 있다.
사기진작을 위해 너무 막기도 무엇해서 외출을 허가해 주긴 했지만, 그럼으로써 잠을 자서 쉬려던 나의 계획은 그들이 무사히 귀선 하는 것을 보아야 하니 저절로 차질을 빚게 마련이다.
집으로 전화를 걸어 출항 전 마지막 안부를 확인하고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직 날이 훤하게 밝아 있는 초저녁 시간이지만 침대에 누웠는데 어찌 잠이 들었던 모양으로 눈을 뜨니 밤 열 시 반이다.
이 시간이면 상륙자 전원이 들어와 있어야 할 시간이니 내려가서 귀선 확인을 해야 하지만 ‘에이 별일 없으니까 조용한 거겠지’ 하는 아전인수의 풀이를 하며 좀 더 두고 보기로 하고 그냥 누워있어 본다.
그러고 있으면 다시 잠이 들어야 할 터인데, 여러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니 도저히 더 누워있을 수가 없어 결국은 벌떡 일어나서 주섬주섬 옷을 주워 입는다. 밑에 내려가 당직사관을 찾았다. 텅 비어 있는 자리뿐이라 현문까지 내려가 당직 부원에게 당직사관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으니 찾으러 간다며 2 항사의 방으로 향한다.
그 자리에서 기다리 느니 통신실로 가서 할 일이나 체크하며 기다릴 요량으로 통신용 컴퓨터 앞에 앉아 깜깜한 화면을 보며 마우스를 살짝 흔들어 준다. 그런데 컴퓨터는 늘 상 켜 놓고 있는 상태라 마우스를 만지기 바쁘게 금방 화면이 떠야 하는데 감감무소식이다.
아직 밑의 당직사관실로 내려가지 않은 걸로 여겨지는 당직사관 2 항사와 연결하기에는 어쩌면 이 일이 잘된 일인지도 모르겠다 싶어 그의 방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를 않는다.
그 사이 내가 원하던 대로 연락을 받고 당직 실로 내려갔구나 싶어, 당직 실로 전화를 거니 수화기를 받아준다.
-예, 2 항사입니다.
하는 응답이 들린다.
-통신실로 와 바.
간단히 지시를 끝내고 마우스를 몇 번 더 움직여 보는데 그가 올라왔다.
-컴퓨터의 화면이 뜨지 않는데 왜 그러지?
하며 마우스를 만져 보였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검은 화면만 보이고 있다.
-새로 부팅하는 방법 있잖아?
CTRL BAR, ALT BAR, 와 DELETE BAR를 함께 눌러서 하는 방법을 나도 알고는 있지만 말을 걸기 위해 물으며 자리를 내준다.
요지부동이던 화면이 다시 부팅이 되는 소리를 내면서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윽고 초기 화면이 터진 것을 보며 자연스럽게 회사의 E-MAIL로 연결하여 우리에게 온 연락사항을 수취하니 토요일과 일요일에 인력관리실 재배치로 인해 전화가 불통이 되니 알려주는 번호를 사용하라는 내용의 이미 별일 없이 지나간 정보가 프린터를 통해 나온다.
사실 이렇게 한밤중에 E-MAIL을 여는 이유는 그 시간에 사용요금을 할인해주는 때문이기도 하다. 오늘의 내 행동도 거부감 없이 그런 방향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황이다.
내가 통신실에서 2 항사를 불러 시킨 이 일은 상륙했던 팀에 속했던 2 항사가 귀선 후, 혹시나 속 좁은 판단으로 나에 대한 반감이나 거부감을 가지지 않게 하면서도, 게으름이나 피곤을 빙자하여 자신의 당직을 소홀히 하는 마음가짐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점을 슬그머니 일깨워 주는 방편으로 활용하려고 한 일이다.
-3시 반이 되면 대리 점원이 올 건데 이걸 건네주렴.
-나도 그때는 내려갈 거야.
하는 말을 덧붙이며 당직실로 내려가는 2 항사에게 회사로 보낼 서류봉투를 전달해 주었다.
-자, 그럼 수고해라.
하는 마지막 말도 빼놓지 않고 보태면서 자리를 떠 내 방으로 향했다.
마지막 출항 수속을 위해서 대리 점원을 기다리는데, 네 시가 지나도록 오질 않는다. 3 항사에게 전화를 걸게 했더니 출항 시간이 5시 20분이며 자신은 앞으로 20분 후인 4시 20분쯤에 배에 도착하겠 단다.
지금까지 우리에게 알려준 예정은 파일로트가 4시 30분 승선이어서 그에 따라 모든 준비를 하였건만 자신이 그 시간쯤 에 온다고 하니, 어제 미리 알려준 예정은 그만 헛것이 되어 그만큼 잠을 덜 자며 일찍부터 출항 준비로 설친 일이 억울할 지경이다.
도선 보트로 다섯 시가 다되어 승선한 도선사에 의해 부두에 묶어 두었던 계류삭들을 전부 벗겨 낸 후 터그 보트로 밀고 당기며 선수를 외해로 돌리는 일이 지금 까지 뉴캐슬을 출항하던 어느 때 보다도 배 이상 나가는 시간이 걸림을 보니 139,405톤이라는 화물은 뉴캐슬에서 선적하는 양 치고는 많이 싣게 된 실적으로 항로상의 수심에 빼곡하니 맞닿아 있을 정도로 흘수가 깊어지어 천수 효과가 커서 그리 되는 모양이다.
파일로트의 말로는 고조시의 조고 차가 높은 편으로 밀물로 밀려들어오는 조류가 센 것도 이유의 하나라는 설명인데 우리 배가 꼭 지나쳐야 하는 중간에 있는 DYKE BERTH에 접안 중인 선박이 우리 배가 지나칠 때 받는 압류로 인해 배가 부두에서 떨어지는 영향이 굉장히 커서 옆을 지나칠 때 그 배 계류 색이 팽팽하게 당겨지며 퉁겨지던 소리도 유난스러웠다.
조심스러운 미속으로 그 배를 지나친 후, 기관의 속력을 반속으로 올리어 마지막 대각도 변침이 있는 방파제와 일직선을 이룬 수로로 들어서는 만곡 부위를 통과할 즈음에는 이미 날이 새어 어둠이 사라짐으로써 도선사가 헬리콥터로 하선하는 일도 수월해지게 되었다.
부두를 떠나며 달고 나온 예인선들을 모두 돌려보내는 구역에 도착하여 앞에 있는 예인선부터 차례로 묶었던 예인삭들을 풀어 준다.
그럴 즈음 항구의 방파제 입구부터 그 바깥으로는 육지 쪽 가까이 짙은 안개가 깔려 문을 열어 놓으니 후덥지근하고 끈적끈적한 습도가 브리지 내에서 만져지는 모든 물체와의 불쾌한 접촉을 일깨워 준다.
연락이 닿은 헬리콥터가 날아오는 소리가 귀를 덮기 시작하더니 사뿐히 7번 창 선창 위에 내려앉는다.
<수고했어요>와 <안전항해를 빈다>는 덕담들을 서로 주고받으며 악수를 나눈 도선사가 브리지를 내려가서 헬리콥터에 오르더니 잠시 후 헬기는 잠자리와 같은 동작으로 기체를 살짝 띄워 돌아간다.
이 항구 뉴캐슬과의 이번 항차 마지막 남았던 유대가 끊어지고 보름을 좀 넘기는 귀향 길 항해가 시작되는 새 아침이 밝아 왔지만, 당직자를 제외한 사람들은 날밤을 새운 피로를 재우기 위해 다시 잠자리를 찾아들었는지 배 안은 조용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