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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구름 속에서 나타난 오세아니아호

스치듯 지나쳐야 하는 만남의 인연

by 전희태
_JHT9664.jpg 구상선수(BulbowsBow)를 가진 배의 선수 모습


1번과 2번 Double Bottom Tank(선저 이중저 탱크)의 격벽 용접선 라인이 쇠모 되어 뚫어진 것을 용접하기 위해 아침부터 환풍기를 틀어가며 이중저 탱크 내부의 공기를 순환시켜 사람들이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게 만들어준 후 용접에 들어갔다.


갑판부 선원들은 밀려있는 페인트 칠하는 일로 바쁘니, 그 용접 일은 조기장과 그를 도와주기 위해 갑판부 타수가 함께 하며 일항사도 참여하고 있다.

어지간히 일이 진행되던 중인데 꾸물거리던 날씨가 저 멀리 수평선 쪽에서부터 소나기성 비구름을 잔뜩 몰고 나타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며 될수록 비를 맞지 않아야 하는 본선의 작업을 위해 선수를 어느 방향으로 돌려주어야 비를 좀 덜 맞을 수 있을까? 궁리를 하게 만든다.

좌현으로 틀어주는 게 나을 듯하여 당직사관에게 타를 왼쪽으로 15도 돌려 잡으라고 지시한 후, 앞쪽 수평선을 안개같이 꽉 메우고 있는 검은 구름의 모습에 눈을 주어 살핀다.

헌데 마음에 전해지는 느낌이 아무래도 그 어둠 속에 무언가-배가-있다는 예감이 크게 들어선다.

쌍안경을 들어 자세히 살피니 틀림없이 구름의 암영 속에 배의 모습 만한 크기가 더욱 짙게 나타나고 있다.

어쩌면 느닷없이 침로가 변하는 본선 행동에 의아심을 품을 것 같은 상대선의 상황을 배려하여 돌리던 배의 타를 되돌려 원래의 코스로 다시 잡게 한 후,

-VHF로 저 배를 불러봐라.

또 다른 지시를 한다.


지시받은 이항사가 그 배(Unknown Vessel)를 부르니 잠시 후 대답을 하고 나와서 CH 06으로 교신을 하잔다. 우리도 그 찬넬로 바꾸어서 통화를 시작한다.

서로가 좌현대 좌현으로 통과하자고 약속을 하고, 아무리 찾아봐도 비 구름 속 잘 보이지 않는 그 배 상태에 좀 답답한 마음을 가지고 있던 중 갑자기,

-한국 배가 맞습니까?

하는 이야기가 VHF 전화에서 흘러나온다.

-예, 맞습니다.

우리도 편한 마음으로 통화에 응한다. H상선의 H 오세아니아호였다.


비가 오면 지금 하는 페인트 칠이나, 탱크 내에서 하는 용접 일, 모두가 지장을 받을 것으로 여겨져 배의 선수를 돌려서 조금이라도 비를 피하려고 했었다.

그러나 돌려주려고 하는 방향에서 H오세아니아 호가 나타나니 어쩔 수 없이 원래대로 빗속을 뚫고 진입하게 된 형편이다.


작업 현장에 있는 사람들을 워키토키로 불러, 빗속으로 들어간다고 이야기해주는데, 이미 선수 쪽부터 비가 뿌려지기 시작하더나 어느새 브리지 창문에도 빗줄기가 들이친다.

그 배만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느 정도 거센 소나기의 예봉을 피해 갈 수 있게 왼쪽으로 배를 돌려줄 수가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가진 채 이제야 레이다가 아닌 실제의 모습으로 좌현에서 나타나 눈에 들어오는 빗속의 현대 오세아니아호를 훑어본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H 조선소에서 만들 때부터 결함이 있었다는 소문이 난 배로 알고 있었는데, 지금 보이는 모습도 좌현으로 약간 기울어진 상태인 것 같아 보이는 걸 보니 진짜로 어딘가 이상이라도 있는가 하는 마음을 갖게 한다.


옆으로 지나칠 때 보니 구상선수(Bulbows Bow, 주*1)가 있기는 한데 선수 스템(STEM)이 너무 일자로 우뚝 솟아 보여서, 앞으로 전진하며 속력을 내는 데에 방해받는 영향이 많을 것으로 느껴지는 모습이다. 어쩌면 선입견이 큰 상황 때문에 그리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박이 대양에서 서로 만나게 될 때, 양선이 가진 속력의 합으로 가까워졌다가 또 그런 속력으로 멀어져 가는 게 항양선들 간의 조우하는 모양새이다.


그 안에 타고 있는 선원들 입장도 두 배의 사이가 너무 가깝게 친해지는 것은 충돌을 염두에 둘 때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에, 이쯤 거리를 둔 채 만나면서 헤어지는 것에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 두 배와 그 선원들은 서로의 안전항해를 덕담으로 주고받으며 제 갈 길을 향해 각자의 수평선 위로 사라져 가고 있다.


어느덧 소나기성 비도 깨끗이 지나가 버린 우리 배 주위의 형편이지만, 그 밴 이제야 소나기구름과 나란히 앞서 나가는 때문에, 다시 비구름 속에 잠겨서 보이질 않는다. 하지만 계속 멀어지는 사이로 변했으니 더 이상 충돌을 생각지 않아도 되는 게 우리로서는 즐거운 일이다.


Bon Voyage! H 오세아니아 호여!


주*1 구상선수(球狀船首, Bulbows Bow) : 배가 파도를 생성시킴으로써 받게 되는 조파 저항(造波抵抗)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구(球)의 크기 형상을 적당히 선택하여 선수 하단부에 설비한 선수 재이다. 보기와 달리 그런 모양이 전진을 저해하는 저항을 큰 폭으로 감소시킬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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