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가항력적인 이유
나빠졌던 날씨 덕에 늦어진 ETA를 처음 예정대로 만회하기는 힘들어 보여 어제 낮에 22일 12시로 도착하는 게 가장 나을 것이라 마지막으로 결정하여 그에 맞게 E-MAIL을 보내주었다.
물론 배 위에서의 예정이란 이렇게 수시로 바뀌는 특성이 어쩔 수 없이 있기에 그 예정 시간도 실제로 도착해봐야 마지막이란 말이 맞게 될 것이다.
아침부터 부슬비가 계속 배 주위를 맴돌 듯 내려서, 선실 바깥쪽 작업이 불가능해진 갑판부의 과업을 여덟 시 반부터 하우스 내부 방 및 통로에 왁스 칠하는 것으로 바꿔주었다.
온 방문을 열어 두긴 했지만 이미 칠해진 왁스 때문에 방안 출입이 불가해진 그런 틈새에 하필이면 내 방 선내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나온다. 이 시간에 나에게 전화를 그렇게 길게 울리는 상황은 엔진을 세우겠다는 등의 비상사태의 일이겠기에, 얼른 브리지로 뛰어 올라간다.
아직도 수화기를 들고 전화가 걸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3항사의 뒷모습이 보이고 있다.
-무슨 일이야?
그의 뒤통수에 대고 묻는다.
-예, 보일러 에코노 마이저에서 물이 새어 나와 수리를 위해 기관정지를 할 거랍니다.
얼른 전화기를 내려놓으며 3항사가 대답한다.
-그래? 얼마나 오래 세워야 한대?
-세울 준비 하는데 한참 걸릴 거라고 했지만, 얼마 걸리겠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예정은 있어야 할 것 아니야....
-물이 새는 곳이 작아서 커지기 전에 미리 하는 게 나을 것이라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거참, 도착 시간 좀 맞춰보려는데 정말로 힘이 드는구먼.
쯧쯧 혀까지 차보며 모든 계기를 살펴본다.
현재의 속력을 알리고 있는 DGPS 나 GPS 모두 11.5 knots를 나타내고 있어 그대로 달리면 12시 예정은 무난히 달성될 수 있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으니 괜스레 기관부의 현재 형편에 야속한 생각이 든다.
배를 세워야 하는 상황이 전적으로 그들의 잘못이라고만 여길 수는 없다는 걸 인정하면서도 그래도 항해 중 너무나 자주 세우는 기관의 상황이 짜증 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한참이 지난 10시가 되어서야 진짜로 기관을 세우겠다는 연락이 오기에 얼마나 세울 것이냐고 물으라고 삼항사를 채근한다.
대답을 하는 삼기사가 잠시 기다리게 하더니, 어딘가에 알아보는 눈치이더니 세 시간 정도 예상하지만 실제는 열어봐야 알겠다는 말을 덧붙이는 대답을 해온단다.
그래 22일 12시 도착 예정이 또 <물 건너가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면서, 어제 집에 전화를 걸었을 때 입항이 자꾸 늦어진다니까 그렇다고 너무 서두르다가 일을 그르치지 말라던 아내의 말이 새삼 떠올라서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작정하며 이미 뽀송뽀송하니 마른 상태로 된 왁스 칠을 확인한 후 방으로 들어선다.
이 일이 ACT OF GOD(주*1)적인 일로 취급될 수 있는 일일까? 하여간 배에서는 너무나 자주 발생하는 일이다.
주*1 : ACT OF GOD(불가항력) - 법률관계의 외부에서 생겨나는 사변(事變)으로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도 손해의 발생을 막을 수 없는 일.
예를 들면 일정한 화물을 운송하여야 할 채무를 진 본선에서 기상악화 기타 부득이한 사정으로, 제 때에 운송할 수 없게 된 것과 같은 경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