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나라로 들어가기 전에 필수적으로 거치는 작업
수심 2,000 미터가 훨씬 넘어서는 태평양의 가운데를 항해하고 있다. 호주 입항에 대비하여 발라스트를 조정하고 발라스트 탱크 내의 혹시 오염되었을지도 모르는 해수를 모두 물갈이하는 일에 착수한다.
지금 세계는 유엔이 앞장서서 추진하는 지구의 환경보호 및 해상오염방지를 위한 방안으로 모든 국가는 자신들의 영해로 기항하는 선박에 대하여 깨끗한 몸으로 들어와 주기를 강조하는 법령을 세워 놓고 그에 합당하게 따르지 않는 선박에 대하여는 출입을 거부하거나 어마어마한 벌금을 물리는 일도 서슴치 않고 시행하고 있다.
그런 일이라면 남 앞서 진행하는 선진국으로 자처하는 그 중의 한 나라인 호주 역시 자신들의 연안이 오염됨을 방지하려고 입항하는 모든 선박의 발라스트가 깨끗한 해수이기를 강력히 요구한다.
때문에 대양을 항해하여 이 나라에 들어오는 모든 선박은 항시 깨끗한 발라스트로 입항하려고, 출항지에서 실었던 오염 되었을지도 모르는 해수 발라스트를 깊은 대양에서 깨끗한 해수로 바꿔주는 일을 시행 하면서 항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수를 바꿔주는 실질적인 행동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일을 시행했다는 기록을 규정된 기록부 및 항해일지에 규정대로 적어서 남겨 두는 일이다.
입항 후에는 기항지의 관해관청에서 검사관이 방선하여 본선의 모든 사항을 점검할 때 이 기록이 가장 우선하고, 기록이 미비하다고 느껴서 실제와 일치여부를 가릴 필요가 있다고 판단되면 본선의 발라스트 탱크에서 남은 물과 찌꺼기를 채취하여 육상에서 분석 오염여부도 가려내며 그에 따른 필요한 조치를 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물의 적양하와 더불어 발라스트 취급 역시 일항사의 중요한 업무이다. 오늘 아침부터 발라스트 교환 작업을 시행하겠다는 일항사의 보고가 엊저녁에 있었다.
먼저 6번 선창에 실었던 발라스트 해수를 모두 빼어냈고, 다른 발라스트 탱크에는 계속 대양의 깨끗한 해수를 주입시켜서 넘쳐나게 만든 해수가 에어벤트를 통하여 배출되는 방법으로 물을 바꿔주고 있었는데, 갑자기 기관의 운전이 반속으로 바뀌며 일항사를 찾는 선내 방송이 나온다.
짐작에 발전기에 과부하로 인한 약간의 이상이 생겨 발라스트 교환을 위해 돌리고 있는 대형 펌프의 작동을 멈춰야하는 일이 생겨서 그 작업의 책임자인 일항사를 찾는 것 같다. 즉시 브리지로 올라가서 기관실의 보고를 받아 보니 내 짐작이 맞았다.
당직 중이던 이항사를 발라스트 펌프 중지를 위해 기관실로 내려 보내고 통신장과 내가 잠시 2항사 대신 항해 당직을 서게되었다. 그리고 곧 본선은 비스마르크 해를 지나 솔로몬 바다로 들어섰다. 통신장이라는 직책이 없어지게 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에서 본선 통신장도 이미 항해사 면허를 준비하고 받아운 상태였고 이제 다음 항차부터는 항해사로 편입 될 것이므로 통신사의 항해사 당직 대행은 현직의 통신사가 앞으로 항해사로의 전직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이니 훈련시키는 마음으로 당직대행을 지시한 것이다.
그 동안에도 몇 번의 선내방송은 일항사를 찾는다고 바쁘게 방송을 보내고 있었건만 아직 까지 일항사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다. 기관실을 다녀온 2항사에게 다시 일항사 방을 꼼꼼하게 살피며 찾아보라고 지시하여 내려 보내고 소식을 기다렸다. 일항사 방에 다녀 온 2항사는 일항사가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방을 나간 모양이라는 이야기와 함께 아직 찾지 못했다고 보고해 온다.
곧 찾아지겠지 했던 믿음이 어긋나니, 각가지 사고를 곁들인 별의 별 불길한 상상이 슬며시 든다. 그러나 불미스런 일을 당할 아무런 이유가 떠오르지 않으니 우선은 답답하지만 좀 더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이제 곧 항해당직 교대를 해야 할 시간이 다 되어가니 곧 나타나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있는데,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르고 땀에 젖은 모습의 일항사가 브리지로 들어선다.
-어디 있었어? 조금은 신경질이 난 얼굴로 물으니
-비어있는 발라스트 탱크에 들어가서 상태를 살펴보고 올라오는 중입니다. 하며 좀은 뜨악한 표정으로 대답한다.
-온 배에 방송을 서너 번씩이나 하고 연락을 기다렸는데 소식이 없어 걱정했잖아!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나 혼자의 일방적인 생각으로 흐를 수밖에 없었기에 생긴 한 걱정거리였지 일항사로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휴식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한 상황일 뿐이다.
단지 이런 소소한(?) 일에도 항시 안전을 생각하며 최악의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생활하고 있는, 선내 최고 책임자로서의 내 승선근무 환경이 요구하는 모든 일에 참여하며 이끌어야 한다는 엄연한 사실을 보여주는 작은 에피소드 일뿐이다.
현재 기관부 사정으로 인해 발라스트 배출에 미치는 영향을 체크하면서 작업을 진행하도록 지시하며 일항사와의 면담을 끝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