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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Jul 28. 2017

항해등

폐품이 된 항해등을 거두려는 마음

수리차 떼어 놓은 선미 백색정박등, 좌현 홍색현등, 그리고 우현 녹색현등(왼쪽부터)


 지난번 포항에서 수리업자를 통해서 양현 등을 모두 바꾸어 주었을 때, 신조 인수 이래 계속 사용해 오던 떼어 낸 등은 폐품으로 폐기 처분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물건을 잘 닦고 싸서 창고에 넣는 일항사에게 무엇에 쓰려고 그렇게 닦달을 하여 창고에 보관하느냐 물으니, 혹시 지금 수리해 넣은 현등의 유리가 깨지는 경우에 바꿔 줄 수 있는 스페어로 간직하는 것이라 했었다. 야무진 살림살이를 하는 일항사이니 칭찬을 하여야지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나무랄 수 없는 상황이라, 그냥 잘 놔두라고 이야기하고 끝을 낸 적이 있었다. 


 나머지 마스트의 항해등도 스페어를 수급하여 수리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마침 이곳 그 래드 스톤의 외항에서 장기간 기다려야 하는 스케줄이 나왔다. 

일주일 가량 기다리는 동안 마스트의 항해등을 바꾸는 작업을 하기로 하여 먼저 선수의 전장 등을 내려놓고 보니, 16년 동안 만났던 비바람의 모진 풍상과 높은 파도를 견뎌내느라 그랬을까? 너무나 험악한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변해있다. 

어찌 저리 되도록 사용하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그 모습은 험하게 녹슬어 부서지고 구멍이 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그래도 먼저 번에 수리하여 내려놓은 현등은 등을 달기 위해 설치한 대(臺)는 많이 녹슬고 썩어서 바꿔줘야 했지만, 등의 케이스는 그래도 양호한 편이어서 앞쪽 항해등에 비하면 양반 소리를 들을 만해 보인다. 


 오전 중에 끝낸 전장 등의 상태를 감안하여, 오후에는 후장 등을 바꾸려고 올라가 보니 상태가 아주 양호하여 갈아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을 내게 한다. 

몇 년 전 광양에서 육상 크레인이 움직이던 과정에 크레인 암이 본선의 마스트와 접촉하며 레이더 스캐너와 항해등을 손상시킨 사건이 있었는데, 그때 부서진 항해등을 새 것으로 바꿔준 것이었기 때문에 깨끗한 상태였던 것이다. 

그래서 바꾸지 못한 후장 등은 새것인 채로 예비품으로 가지고 다니기로 하여 창고에 잘 수납해 놓도록 지시를 한다.


 얼마 전부터 육상에서는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건축물의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지난 연가 중에도 서울 시내에서 보았는데, 지방에서도 몇 군데 보았던 일로서 이색적인 인테리어를 위해 건물을 배와 같이 만들어 놓은 걸 여러 군데에서 만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때마다 기왕지사 배 같이 꾸미려 했다면 현등(사이드 라이트)과 장등(마스트 라이트)도 설치하여 진짜 배의 항해하는 분위기까지 만들어 주지~ 하는 생각을 하며 그런 건물들을 항해 중인 배로 비교해보며 쳐다보곤 했었다. 


 이제 정년 단축의 이야기가 찾아오면서 문득 지금까지의 내 인생을 다 바쳐 일한 이 바다를 떠나는 시점이 너무나 아쉬워진 마음이 드니 이런 건물들에 항해등의 모습이 끼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배는 항해 할 때가 살아 있는 느낌을 주는 것이니까...


 그래서 배의 운항에도 지장이 없고 돈이 비싼 것도 아닌 물건으로 배에서 갖고 내릴 만한 기념품을 염두에 두다 보니, 먼저 내려놓았던 못쓰게 된 그 현등이 그런 기념품으론 제격이겠다는 판단이 선다. 


 우리 배가 태어난 후 현역으로 뛰면서 지금까지 항해하는 매일 밤을 계속 켜놓고 달리던 그 등불 빛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배들과 서로를 안전하게 피하면서 지나치는 행운을 나눠 가졌던 것일까? 


 빨간색은 왼쪽 좌현 등이고, 초록빛은 오른쪽 우현 등이라고 표현되는 색깔 있는 불빛을 달고 세계의 바다와 항구를 우리와 같이 누비며 지나온 역사가 그 안에 있다. 

그런 역사를 품고 있는 그 등은 자신의 안에 곱게 간직한 그 역사와는 달리 오랜 풍상에 시달린 거치러 진 모습을 보여 알싸한 가슴 조차 만들어 주었었다. 


 진짜 집에 갖다 놓으면, 그 등들은 자신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내게 해 주고, 나는 그 등의 모습에서 내 지나온 이야기도 찾아볼 수 있으리라. 이번 광양에 가면 기필코 양륙 시켜 인테리어 소품으로 사용해 볼 작정을 세운다.


 그렇게 집으로 택배 배달을 시키면, 나와의 끈끈한 인연을 다시 한번 더 이어 갈 수 있겠지...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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