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급상황에 대처하는 방법들
그래드 스톤(GLADSTONE)에 도착한 후 외항에서 투묘하고 장기간 대기하게 된 점을 대리점의 연락으로 알고 난 후, 그 여유롭게 된 시간들을 어찌 사용할까? 여러 가지로 궁리를 해봤다.
결국 지금까지 각 부서별로 조처할 시간이 필요했지만 바쁜 운항시간에 떠밀리어 해결할 시간이 없어 밀어 둘 수밖에 없었던 일들을 해결하는데 쓰기로 한다.
갑판부는 우선 낡은 항해등을 교체하고, 녹이 다시 나오기 시작한 연돌(煙突)을 청낙하여 회사 마크를 화사하게 페인팅하는 작업에 투입하기로 했다.
기관부는 기관의 정비를 위해 전반적인 점검을 실시하였는데, 그 와중에 주기 5번 실린더 커버에서 물이 새는 것을 발견하게 되니, 갑자기 비상 상황으로 돌변하는 일에 이르게 되었다. 즉시 회사에 연락을 하였다.
금이 간 녀석을 바꿔 넣어 줄 스페어가 없는 상황이므로 가능하다면 교체해 줄 수 있는 새 커버의 공수(空輸)를 이곳까지 해주도록 회사에 요청하는 전화를 긴급으로 넣은 것이다.
지난번 포항에서 1번 실린더 커버에서 물이 새는 것을 예비품으로 바꿔준 후 크랙이 생겨 물이 새던 녀석은 수리를 해서 다시 쓰기 위해 하륙시켜 놓았으므로 현재 배 안에는 예비품이 없는 상황이다.
그나마 그 무게가 3.5톤이라는 만만치 않게 무거운 물건이니 공수해오는 과정이 수월치 않을 애물단지 같이 된 셈이다.
우선 운임이 7-8,000불에 달할 것이라는 선단의 언급인데 그건 공수해서 호주까지 오는 비행기 운임일 테고, 그걸 이 곳 외항에 있는 본선에다가 실어 주게 하는 것을 원하는 본선의 의견대로 해주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도 당해야 하는 상황같이 되었다.
하나 돈이 얼마나 들든 어찌하랴 바꿔 주지 않고서는 장시간 운항이 불가능해진 상황으로 판단이 되는데......
우선은 여기 외항에서 대기하고 있는 시간이 많기 때문에 움직이지 않고 있는 그동안에 공수 조치 조차 해 줄 만큼 시간이 많아진 점을 먼저 감사해야 할 형편이다.
빼지도 박지도 못할 꼼짝 못 할 상황이지만, 이렇게 시간이나마 충분히 제공해주어 대처할 수 있는 여러 방안을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럽다.
그 점을 우리는 주어진 우리 배의 복으로 알지만, 앞으로 더 이상 이런 식의 빠듯한 일이 생기지 않게 되기만은 간절히 바라는 일이다.
우리 배의 승조원 전부가 합심하여 예방 차원의 정비를 계속 열심히 유지하면서 예비품을 항상 가지고 다니는 걸 등한히 하지만 않으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길이 있다고 했던가? 문제를 일으킨 물건을 공수하여 본선에 배달시키려면 자그마치 1,500 만원의 돈이 든다는 예상에 회사는 공수하는 문제는 일단 접어두고, 다른 차선의 방법을 알아내어서 통보 해왔다.
물이 새어 나오는 부분이 관계된, 물이 통하는 통로 부분들을 기술적으로 막아준 후, 엔진을 사용해도 한 달 정도는 물이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고 견딜 수 있으니 그런 방법으로 귀항하라는 방안을 자세히 알려 온 것이다.
그 정도의 기간을 물이 새 나오지 않게 해주며 항해할 수 있다면 현재로서는 사실 가장 바람직한 일인 것이 오버타임을 안 하고도 쉽게 우리가 처치한 후 국내 항에 들어가서 수리하던가 여타 기술적인 사항에 의한 뒤처리를 하면 되니 말이다.
그런 상황을 받아들이어 제대로 해내기 위해서 필요한 가장 먼저 체크해야 할 항목을 내 마음은 날씨부터 꼽아주고 있다. 그래서 기상도를 들여다본다.
기압 배치 상 바람 불 일이 별로 없어 보이는데도 10 knots가 살짝 넘는 바람이 일어서 약간의 백파를 만들어 주고 한 번씩 뱃전을 스쳐 지나는 작은 너울에 의해 선체에 약간의 충격이 전달되고 있다.
그때마다 별다른 큰일이 생기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혹시 닻줄이 끌리지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생긴다.
그래서 닻줄을 5 SHACKLES에서 7 샤클로 두 개 절(샤클)을 더 내주어 파주력(주*1)을 키우도록 저녁 식사 때 지시하였다.
주*1 파주력(把駐力) : 투하된 닻이 해저로 깊이 파고 들어가 저항력을 만들어, 선체에 작용하는 조류나 바람에 대항하는 힘을 파주력이라 부르며, 파주력의 크기는 선체와 닻의 모양, 닻줄의 길이, 해저 저질의 상태가 큰 관건이 되고 있다.
실무에서 저질이 뻘(Mud)인 곳에서 장기간 닻을 사용 중일 때, 너무 닻이 깊이 박혀-파주력이 너무 좋아져- 닻을 감아 들여야 할 때 본선의 윈드라스를 아무리 돌려도, 꼼짝달싹 안 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안전한 방법은 조석의 조고 차를 이용하는 방법이 가장 무난하다.
즉 저조 시에 닻줄을 바짝 감아질 때까지 바짝 감아준 후 잠가 놓고 기다리면, 밀물이 들 때에 본선의 부력 때문에 조고 상승분만큼 수면이 상승하여 선체가 떠오를 때, 당겨져 있던 닻줄이 저절로 끌어당겨지며 닻이 해저에서 올라오게 되는 것이고(Anchor Aweight 닻떠 상태), 그때를 기다렸다가 감아 들이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