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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ug 01. 2017

진급추천을 해줬건만...

믿고 추천한 사람에 대한 작은 배반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원들 모습

 순간 속도가 30 knots가 넘는 바람이 이따금 치고 들어오듯 불어와서 풍향 풍속기의 지시 바늘을 삐딱하니 움직여서 눈금을 올려준다. 그때마다, 가슴은 철렁하는 불안감을 커지게 하는 바람 소리를 따라 춤추고 있다.

어둠이 스며드는 저녁때가 되면서 더욱 높아지는 바람 소리가 불안감을 점점 더 키워주고 있는 것이다. 


 수리한다고 주기의 피스톤 커버를 열어 놓고 있는 상황이라, 닻이라도 끌리는 비상사태를 만나도 막을 수 있는 방법이라곤 지금 사용하고 있는 왼쪽 닻에 더하여 오른쪽의 닻을 투하해주는 조선술 밖에 별다른 뾰족한 수가 없는 상태 역시 불안을 재촉하는 원인의 하나이다. 


 혹시 잘 박혀있다고 생각하는 닻이지만, 바람이란 외력에 끌리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의구심에 열심히 레이더로 위치를 확인하여 이상 없음을 점검하면서도, 또다시 해면 상태를 창밖으로 내다보며 물표의 달라짐이 없는가? 까지 눈으로 직접 살피느라 딴생각할 여념조차 없다. 


 이런 마음가짐으론 잠을 푹 자기가 어려운 상태라 옷도 벗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서 이따금 쿵하니 전달되어오는 바람과 파도에 의한 선체 충격을 감지하며 어서 바람이 자주기를 간절히 염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해저의 상태는 뻘 흙이라 닻의 박힘 상태(把住力)가 제일 좋은 편이고 수심도 25 미터 내외로 알맞은 곳이라 어지간한 바람에는 충분히 견디어 낼 것으로 믿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만에 하나 발생할 수도 있는 닻의 끌림이 있더라도 얼른 알아내어 대처할 수 있게 당직 근무자가 철저한 임무 수행하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하도록 야간 지시 록에 적어 놓고 있기도 하다. 


 이불 위로 누워 있다가 그대로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약간의 추위 속에 뇨의(尿意)를 느끼어 얼른 일어나 볼일을 보며 시계를 보니 어느새 새벽 두 시 반이다. 

기상상황이 어찌 되었나? 알아보려 브리지에 전화를 걸었는데 수화기를 받아주질 않고 있다. 한참을 들고 있다 포기하고 내려놓는다. 

 당직자가 자리를 비우고 있는 모양이다. 확인하기 위해 우선 침실을 나서는데 방문 앞에 있는 문서 보관함에 끼워 놓인 두툼한 문서들이 보인다. 얼른 들어서 체크해본다. 통신요금 할인 시간대에 찾아 들어가 받아낸 이메일로 회사로부터 온 문서들이다. 


 흘낏 문서의 제목들을 훑어보는데 눈에 확 들어오는 내용이 있다. 좋아서 느끼는 반가움의 표현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대세에 밀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체념 섞인 마음으로 읽어 볼 내용이다.

어차피 알고는 있었지만 나를 겨냥하고 찾아온 정년 단축이란 내용을 담고 있는 공문이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이다. 


 펼쳐보는 순간에 다시 찾아드는 체념이랄까? 아니면 꿋꿋하게 수용함을 보이려 함이런가? 하여간 묘한 감정의 파동을 손끝에서부터 다스리며 첫 쪽부터 차분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내용이야 이미 그렇게 된다고 알려진 걸 문서화한 것이니 모를 리가 없지만 세부적인 조처가 어찌 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공문의 내용 중 단서로 달아 놓은 조건만 통과한다면, 나의 경우 이 배를 연가로 내린 후 내년 12월까지는 한 번 더 승선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지는 모양이다. 단지 그때에는 신분이 촉탁으로 바뀐 상황이긴 하지만..... 


 각오를 다지며 수용할 태세는 이미 갖추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착잡한 심정이 다시 고개를 드는 씁쓸한 감정의 물꼬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지난번 이 이야기를 처음 알았을 때와는 또 다른 마음의 움직임이 파동을 치듯 다가서려는 걸 다독여 준다. 


 계속 그런 감정의 그늘에만 있을 수는 없는 것. 당장 브리지에 올라가 기상 상황을 판단하고 당직자의 현황도 파악할 일이 남아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이 휄뎅그리 비어있는 듯한 브리지 내부의 모습이 안 그래도 서늘함 속에 팽개쳐진 듯 한 분위기와 어울리는 썰렁하니 반팔 옷을 입고 올라 온 내 몸뚱이에 소름을 돋아나게 해준다. 


 풍향 풍속기를 찾아 우선 바늘이 머물고 있는 눈금을 읽으며 켜져 있는 레이더 화면의 바리에블 마커가 잡고 있는 고정 물표인 레이콘(RADIO BEACON)과의 거리를 확인한다. 


 풍속은 아직도 30 knots대를 못 잊은 듯 오르내리고 있어 저녁때보다 별로 변하지 않은 모습을 보이고 4 마일 레인지로 맞춰진 레이콘 역시 그대로 변화 없는 거리 상황을 계속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배의 상황이 더 이상 나빠지는 기상만 안 나타나면 안전할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기는 하지만, 바람이 이따금 세어질 때마다 내는 소리를 들으며 당직자가 자리를 비우고 있다는 사실만은 짚고 넘겨야겠다는 생각에 찾아 나섰다. 

 문득 제대 말년을 조심해야 한다던 이야기가 떠오르며, 나의 해상 생활 끝마무리를 유종의 미를 갖추고 받아들이게 하려면 종전보다 더욱더 모든 일에 신경을 쓰며 간수해야 할 것이란 경각심을 부추겨 갈무리한다. 


 당직사관은 아래층에 내려가서 비디오를 보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내가 진급 내신 추천을 해줬고 그래서 우리 배에서 본선 진급까지 한 친구인데 이런 식으로 나에게 대해도 된다는 말인가? 하는 배신감이 생겨 큰소리로 질타를 하고 싶은 걸 꾹 참는다.


-닻은 끌리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거야. 

하며 자리를 비운 행위가 어떤 일을 가져올 수 있다는 암시를 주며 더 이상의 말은 보태지 않고 브리지로 올려 보냈다. 

 경험이 없어 그러기는 하겠지만, 자신의 당직 태만이 배에다가 어떤 피해를 가져다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아직은 피부로 생생하게 느낄 수가 없는 모양이다. 


 어쨌거나 <책임감의 결여>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진 것을 간과하고 추천했던 내가 사람 볼 줄을 몰랐던 것은 아닐까? 아니라면 다시 그를 교육하고, 약점을 깨우치고, 보강하고, 맡은 바 일에 충실하게 적응하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이끌어 주어서, 나의 추천이 결코 허술하니 이뤄진 것이 아니었다는 증거로 삼아야 하나를 두고 고민에 빠진다. 


 비교해보면 <도토리 키 재기>의 고만고만한 사람들을 놓고 인연이 좋아 추천도 해줄 수 있었던 것인데, 그래도 일단 추천을 했다면 그 뒷감당도 끝까지 해줘야 하는 것이 도리일 터. 

내가 같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성실하게 당직서는 근무 자세부터 바로 잡도록 잔소리 께나 해줘야 할 모양이다. 

바람이 계속 잠들지 않은 상태로 이어지고 있어 ANCHOR CHAIN을 2 SHACKLES 더 내어주어 모두 9 SHACKLES 이 되게 하였다. 

기관은 아직도 완전히 사용할 수 없는 상태로 만들려면 오늘 하룻밤을 더 지내야 하는 수리 상황은 변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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