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근히 비교되는 정박선들의 당직 근무 상태.
배가 정박해 있을 때, 다른 배나 주위에 있는 타 해상 구조물들에게, 자신의 현 상태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켜 놓도록 강제하고 있는 국제충돌 예방법에 정해 놓은 등화에 정박등이란 게 있다.
다른 불은 켜 놓지 못하더라도, 이 등화만큼은 정박 중이라면 틀림없이 꼭 켜 두어야 하는 것을 규정해 두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등불을 켜두지 않고 투묘하고 있었는데, 다른 선박이 부근을 지나치다가 충돌사고가 발생된 경우가 생겼다면, 그 상대선이 피해선에게 정박등을 켜고 있지 않아서 정박 선인 줄 모르고 있었다는 식의 이의를 제기한다면, 비록 피해를 당한 입장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 충돌에 대한 책임 일부를 공유하게도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강제적으로 자신의 상태를 다른 이 들에게 알려 주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이 정박등은 통상 일몰에서 일출 때까지 켜두지만, 좀 더 밝은 조명을 위해 갑판 상에 켜주는 투광등과 같은 다른 등불들도 함께 켜놓곤 한다.
해가 지는 저녁 일몰 무렵부터 아침이 되어 해가 떠오르는 시간까지, 더하여 안개등으로 시정이 불량할 때에도 켜 놓을 수 있는 이들 등불을 그렇게 시간 맞춰서 켜주고 꺼주기가 쉬운 일인 듯싶지만 생각만큼 그렇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통상적으로 정박 시간에 당직 근무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정확한 시간을 맞추어 가며 당직을 서기에는 아무래도 좀 느슨해 있는 때가 많기 때문이다.
사실 정박 중인 상태는 항해 때와는 다르게 당직을 서더라도 빡빡한 경계 근무에 쫓기는 게 아니기에, 별 이상이 없는 기상 상황이거나 주위 환경이라면, 어느 정도 긴장이 풀린 상태로 근무를 서도 그대로 넘어갈 수 있는 여지가 남아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혹자는 정박 당직 중이건만, 당직이 아닌 다른 일에 잠깐 빠져 당직 중에 챙겨줘야 할 일을 깜박 놓치는 경우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요 며칠 새 이곳 그래드스톤(GLADSTONE)의 외항에 투묘해 놓고 기다리고 있는 배가 우리 배를 포함해서 네 척이나 있다.
오늘도 새벽 운동을 나간 시간에 어둠 속에서 보이는 그 네 척의 배들은 각각 자신의 정박등과 갑판상 조명등을 환하게 켜 놓고 있었다.
내가 스스로에게 할당시켜놓은 채워야 할 새벽 운동량에 점점 접근되면서, 시간도 그에 따라 어느새 먼동이 터오고 어둠 역시 어슴푸레하니 거두어지기 시작한다.
이제 정확한 당직을 수행하고 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시간이 다가온 셈이다. 동녘에서 불그스레 먼동이 터 오며 어둠을 지워가고 있건만, 우리 배를 포함하여 아직 정박등과 조명 등불을 꺼주는 배는 보이지 않고 있다.
-자! 한 바퀴 더 돌기 전에 꺼줘라!
응원하는 마음가짐으로 브리지를 한번 쳐다보고 열심히 선수 쪽을 향하고 있는데 갑자기 살포시 곁에 있던 밝음이 멈칫하더니 약간의 어둠이 스치듯 지나침을 퍼뜩 느껴본다.
우리 배의 당직자가 정박등을 비롯하여 갑판상의 모든 조명등을 꺼 준 순간이 살짝 흘러가며 내 눈을 어리게 한 것이다. 얼른 고개를 들어 저 멀리 떠 있는 다른 배들의 모습을 살펴본다.
아직까지 어떤 배도 불을 끈 배가 없지만, 동녘으로 떠오르는 해는 갸웃이 얼굴을 내밀어 환한 인사를 해오고 있다. 우리 배만 시간 맞춰서 불을 꺼준 것이다.
그만큼 우리 배의 당직자들이 철저히 근무하고 있다고 봐도 틀림없는 표지(標識)이기에 만족한 마음으로 운동하는 발걸음을 선미 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나머지 운동량마저 채워서 끝을 내준 후, 방으로 돌아오면서, 마음이 흐뭇하니 가라앉아주니, 오늘은 하루 종일 기분 좋을 것 같은 예감에 즐겁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