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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희태 Aug 07. 2017

맥주내기 시합의 심판이 되다

공연히 심판이 내기 결과에 미안해할 필요는 없건만.

브라질 어느 항구에서 승선할 배를 기다리던 중 시내 구경을 하다가 만난 풍경


 오늘도 부두 접안을 기다리는 시간이 계속되어 정박 대기 중의 선내 정비 작업을 위한 아침 미팅 시간에 참가하려고 주갑판 상 미팅룸을 찾는다. 


 마침 나의 출현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포즈의 반가운 표정으로, 말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선장님 지난번 항차 캐나다에 갔다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투묘부터 했었지요? 

 말을 물어 온 사람은 중국교포 승조원인 조타수 리(李)군이다. 

-그때 어느 항구로 들어갔는데?

 어느 때를 이야기하는 건지 헷갈리는 기분이 들어 반문을 했다.

-광양이었습니다. 새벽에 들어간다고 속력을 낮추기보다는 그대로 들어가 닻을 놓는 게 낫겠다며 밤에 들어가서 닻을 투묘했잖아요. 

그 친구는 당시의 사정을 소상히 기억하고 있는 대답을 한다. 

-그래, 맞았어, 그때 도착하며 투묘부터 했었지, 근데 그건 왜 묻는 거야? 

의아해하는 내 물음에 옆에 있던 갑판장이,

-우린 맥주를 얻어 마시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저 친구 둘이서 내기를 했거든요. 

한다. 

-거 봐! 내 말이 맞잖아, 

하며 나에게 물어봤던 리군이 내기의 상대자인 역시 중국교포 승조원인 윤(尹)군에게 자신이 이겼음을 확인시키려 한다. 

-도대체 어찌 된 건데? 

새삼스레 그들이 내기를 걸게 된 상황을 알아내려고 하니 이기고 있는 리군이 설명을 한다. 


당시 조타수인 리군은 브리지에서 근무했고, 갑판수인 윤군은 닻을 내리려고 할 때의 선수루에서 근무하는 입장인데, 리군은 닻을 내린 상황을 브리지에서 근무하며 보고 알았다고 이야기하는 반면, 

윤군은 그때 자신은 선수루에 가지 않았으니 투묘 준비나, 투묘를 한 적이 없다는 입장을 가지게 되어, 서로 우기다가 시합이 된 것이란다.


그런데 양보 없이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우기다 보니, 그럼 누가 맞는지 알아보고 틀린 사람은 맥주 한 박스를 내놓기로 한다는 내기가 자연스럽지만 결코 자연스럽지만은 않게 이루어진 것이다. 


 옆에 있는 우리들이야 맥주만 얻어 마시면 되는 일이지만, 내기에 진 윤군은 너무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한 대가로는, 수출 선원의 입장에선 좀 과한 벌칙을 당해야 할 걸로 결판이 난 셈이다.


 우리들은 살아가며 자신의 기억에 의존하여 지난 일을 이야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때마다 그 기억이란 것이 그렇게 정확하고 틀림없는 상황이라 믿고 있었건만, 실제에 있어서는 사실과 다르게 기억하고 있는 상황을 나중에 확인하며 쓴웃음 짓는 일도 이따금 경험한다. 


 오늘 아침 이들의 기억 싸움도 그런 유의 한 가지 일로서, 아침 TBM 모임에서 한바탕 웃고 넘어가는 이야깃거리로 지나치긴 했지만, 나도 투묘한 것으로 이야기한 내 기억을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나중에 방에 왔을 때, 지나간 당시의 컨디션 리포트를 다시 뒤적여 봤다. 


 기록은 128 항차 2000년 11월 22일 2115시. 광양항 VLCC Anchorage인 북위 34도 38분, 동경 127도 58분 위치에 투묘한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그러고 보니, 당시 도착 즉시, 투묘 대기 안 하고, 새벽 도선사 승선 시간에 맞추려면, 한밤중에 도착할 예상을 늦추어 새벽에 도착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려고 속력을 내린 채 꾸물거리는 항해로 밤새 고생하기보다는, 아예 예상되는 이른 밤에 도착하여서 즉시 닻을 내려준 후, 도선사가 승선한다는 새벽 시간까지 다만 몇 시 간이라도 쉬면서 기다리는 게 낫겠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기록은 그렇게 감속 없이 제대로 달렸고,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투묘까지 했다는 리군의 기억이 맞았음을 완연하게 확인시켜주고 있었다. 


 이제 그들 교포 선원들의 기억을 위해 내가 해줄 일 한 가지 만이 남은 셈이다.

기왕지사 내기를 했으니, 그 승패에 대한 책임은 지도록 유도는 하겠지만, 그들의 형편을 고려하여, 앞으로 단체 회식하는 자리를 빌려 내가 맥주 한 박스를 대신 내주는 형식을 빌어 진값을 물어주면서, 앞으로 살아가면서는 결코 쓸데없는 내기를 오기로 버티지 말도록 이야기해 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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