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경험을 모두어
행여나 또 연기될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기다린 오늘 새벽의 도선사 승선은 예정 변경됨이 없이 4시 30분에 헬기가 날아와 무사히 본선에 내려주어 접안을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새벽의 어둠을 뚫고 반짝거리고 있는 이곳 항로상에 설치된 오른쪽은 녹등 왼쪽엔 홍등 계열의 항로 부표 군을 바라보면서 누군가 공항 활주로 같다는 이야기를 해서 그럴듯한 표현이라는 마음을 품으며 그래드스톤 외항에서 내항을 향한 항로를 들어선다.
0650시 크린톤 부두에 출항 자세인 우현 접안을 하기 위해 터그보트의 도움을 받아 배를 180도 돌리어 부두에 댄 것이다.
입항수속을 하며 구서 면제 증서(deratting exemption cert.(주*1)의 유효기간이 4월 8일에 끝나므로 새로 발급하게 해달라고 청하니 요사이 검역관들이 바빠서 언제 올지 모르겠다며 외항에서 대기 중일 때 신청하지 그랬느냐는 투로 이야기를 하는 대리 점원의 태도는 우리를 위한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으로서는 좀 건방진 매너로 보인다.
아울러 청수 200톤 싣는 것 하며, 한 사람 병원에 가는 것까지 신청하니 자신이 나가서 수배하여 시간을 확정하겠다며 아침 9시 15분에 VHF로 전화를 걸어 달라는 말을 남기며 본선을 떠나갔다.
그런데 잠시 후에 검역관이 승선했다는 보고가 현문에서 내 방 전화로 연락을 해온다. 내려가 맞으니 두 사람이 올라왔는데 한 사람은 보조로서 실습을 나온 사람인 듯 동행한 사람으로부터 연신 설명을 받으며 구서 면제 증서를 발급해주려는 작업에 들어간다.
배를 한번 둘러보겠다며 내려 간 이 친구들이 냉장고, 주방만을 본 것이 아니라 기관실에도 내려가고 갑판을 빙 둘러보고 나중에는 구명정에도 올라가서 체크를 한 연후에 육상으로 양륙 반출시켜야 하는 쓰레기의 수거상태까지 꼼꼼히 검사하더니, 쓰레기가 새어나가지 않게 비닐 주머니를 잘 묶어 놓으라고 하며 합격한 새로운 증서를 가지고 내일 다시 오겠다며 본선을 떠난다.
자신들 직원의 실습을 위해 본선의 상황을 일일이 점검해가며 교육을 하느라고 본선을 뒤지고 다닌 그동안, 우리는 혹시 재수 없게 무슨 지적 사항이라도 떠 오를까 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들을 수발하며 도와주도록 2 항사를 바짝 따라다니게 하였다.
대리 점원이 연락을 하라던 시간이 되었을 때 전화를 거니, 병원 가는 일은 아침 10시에 택시를 보내주어 가도록 하고, 청수 수급은 13시부터 시작하기로 했다는 전언을 준다.
입항 후 받는 스트레스를 포함한 한바탕의 일들이 끝이 났다. 마침 이곳에서 선식을 차리고 있는 교포가 찾아와서 그 차를 타고 외출하기로 한다.
점심식사를 하고 상륙을 하여 디지털 사진 몇 장을 찍고 슈퍼마켓에 잠깐 들렸다가 들어왔다.
들어오며 보니 드럼통으로 보급되는 L.O 가 도착하여 있는데 부두에 그냥 놔두고 있다. 마침 당직 중이던 2 항사를 통로에서 만나 의례적인 인사 말로,
-배에 무슨 일 없었지?
하고 물으니 정색을 하며,
-무슨 일이 없는 게 아니라 생겼습니다.
하는 대답을 태연히 한다.
순간적으로 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철렁하는 가슴이 떨어지는 기분이 든다.
-무슨 일이 생겼는데?
사고가 났던가? 아니면 PSC 검사라던가 그 외 다른 관해 관청에서 와서 검사라도 하는 일이라도 생겼는가? 하는 의구심에 바짝 긴장하여 물으니,
-L.O 드럼이 왔는데 본선 크레인으론 부두까지 리치가 닿지를 않아 육상의 갱웨이 올리는데 쓰는 크레인을 사용하려 했지만 못쓰게 하여 대리점에 연락하였더니 대리 점원이 온다고 한 후 아마 지금 오고 있는 중입니다. 한다.
육상의 크레인을 사용한다는 것은 이곳 부두노조가 개입되는 하역작업을 하는 행위-하역비를 받아야 하는 일-로 간주되기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일 가능성이 크다.
2 항사의 호들갑스러운(?) 대답으로 순간적으로 걱정을 가졌던 내가 짐작하던 식으로 따지니 별일이 아니구먼! 하는 안도의 심정이 되며, 괜스레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2 항사에게 좀은 힐난하는 눈초리를 보내며,
-야! 깜짝 놀랐잖아, 뭐 그런 일을 갖고 큰일이 생겼다고 하노?
하면서 손에 들고 있는 쇼핑한 물건부터 치우려고 방으로 올라간다.
올라가는 동안 드럼통 옮기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
모두들 드럼통에 기름이 들어있는 채로 들어 올리는 방법만 생각했지, 기름을 펌프로 퍼 올려 다른 드럼에 옮겨 담아서 옮기는 방법 같은 아이디어는 생각조차 해보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닐까?
육상크레인을 쓰면 자그마치 2,000불이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데 그건 회사로부터 사정없이 욕을 먹어야 할, 어쩌면 요즈음 같은 시절에는 책임 추궁조차 각오해야 할지 모를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니 자연히 바쁘게 뛰어 아래층으로 달려가 흥분한 말로 펌프로 이송하자는 내 의견을 큰 소리로 피력하며 그대로 실천하자고 하였다.
별다른 뾰족한 방법 중엔 여럿이 드럼통을 들어 좀 더 아래쪽의 우리 배 크레인이 닿을 수 있는 장소까지 내려주는 것은 어떨까 하는 방법도 나왔으나, 만약 그러다가 잘못되어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기름 유출로 인한 큰 오염사고도 예견되는 일이라 결국 내 이야기 같은 방법으로 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났다.
나의 생각은 기름 이송에 작은 에어펌프를 생각했으나, 기관수 한 사람이 휴대 이동식 기름 이송 펌프를 사용함이 쉽겠다는 의견을 더 내어 440 볼트 짜리 이동 펌프를 이용하기로 확정시켰다.
이제 옮겨 담을 빈 드럼통 5개를 준비하는 일만 남아 모두들 드럼통을 가지러 가려고 하는데 기관장이 한 개만 가지고 오라고 지시한다.
순간적으론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가 의아한 마음이었지만, 기름이 옮겨지면 부두에서 내용물을 뽑아내 준 빈 드럼통을 빨리 갖고 올라와 이번에는 그곳에다 다음번 드럼통의 것을 옮겨주는 릴레이 식으로 하면 되지 않느냐는 이야기에 모두가 역시 하는 마음으로 승복한다.
결과적으로 맨 처음 옮겨준 한 통만 준비해도 되는 것이니, 생각을 떠 올리고 나니 아주 간단한 일이 아닌가?
콜럼버스와 달걀의 일화가 저절로 생각되어졌다.
역시 여러 사람의 의견을 취합하여 결정하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일이었다.
오염사고 방지를 염두에 두고 조심해서 하느라 기름 이송에 시간이야 좀 걸렸지만 그래도 다른 부대비용 한 푼 안 들이고도 안전하게 L.O 다섯 드럼을 무사하게 배로 옮겨 실을 수가 있었다.
주*1 - 구서 면제 증서(derattingexemption cert) :
국제 간을 운항하는 선박의 방역 상황을 점검하여, 쥐를 잡기 위한 소독이 필요 없음을 증명해주는 증서.
통상 6개월 한도 기간으로 발급되며, 항해 중 기간이 만료되면 입항지에서 점검 검사를 받아 통과되면 발급받을 수 있음.
점검에 통과되지 못할 경우, 강제적 방법인 직접 구서 소독 작업을 실시한 후 구서 증서(deratting cert.)를 발급받게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