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임토의
개인수첩이라는 문건이 우리 회사에 있다.
새로 승선하는 배에 가서 그 배의 사정을 바르고 빠르게 알고 익히게 하려고 본인이 스스로 빈칸에 정보를 적어 넣게 되어 있는 회사에서 만들어 놓은 소책자이다.
얼마 전 그 내용을 대폭 수정 보완하여 그 수정된 부분을 이메일로 보내와서 필요한 만큼 사본을 만들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승조원들의 구판 개인수첩에다 수정 보완해서 쓰라는 공문이 왔기에, 오늘 그 보완된 사본을 나누어주고 교육도 할 겸해서 모든 승조원을 수속 사무실에 모이도록 했다.
수정 작업이 모두 끝난 후, 요사이 좀 나태 해져 있는 정신상태를 가다듬고 선내 환경을 깨끗이 유지하기 위한 이야기 한 건도 꺼내었다.
탈의실 사용을 의무화하는 안건이다. 아울러 <제자리 둘려주기 운동>의 취지를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스스로의 생활을 명랑하고 즐겁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 운동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회사에서 매달 각부별로 안건의 제목을 주고 그 작업을 행하기 위한 안전사항을 찾아내어 표어 및 카드를 만들 수 있도록 보고하라는 사항이 벌써 몇 개월 째 계속하고 있는데 우리 배에서는 갑판 부만 두 번의 우수상을 받았고, 기관부는 입상의 기록이 없어 안타까운 마음 금할 길 없으니, 이번에 보내온 안건에서는 꼭 당선작이 나오도록 해 달라고 부탁 아닌 부탁을 하였다.
이는 아무래도 성의 없이 문안을 작성하여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털어 낼 수가 없어, 다시 한번 강조하여 새로운 마음으로 참여해 주길 바라는 배려에서였다.
그런 후에 모임을 끝내고 방으로 돌아왔다가 오늘의 정오 위치 보고(NOONREPORT)를 보내려고 통신실에서 컴퓨터 앞에 앉아 전보 문안을 작성하고 있는데, 내방의 전화벨 울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얼른 방으로 가서 전화기를 들었지만, 그 순간 저쪽에서 수화기를 놓은 모양이다. 혹시 브리지에서 걸었을까 싶어 브리지로 전화를 걸어 확인했지만 신호는 가는데 받지를 않는다. 잠시 신호음을 들으며 기다리다 포기하고 끊고 돌아서서 통신실로 다시 가려는 데 전화벨 소리가 다시 울려온다.
얼른 되돌아가서 받아 드니
-선장님 저에게 전화를 걸었었습니까?
하는 브리지에 있는 2 항사의 확인 전화이다.
-그래, 혹시 너 좀 전에 나한테 전화 걸지 않았었니?
하고 물으니
-아니요, 걸지 않았었는데요.
한다.
-그래? 알았어, 끊는다.
수화기를 올려놓고 하던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통신실로 다시 찾아갔다.
전보를 언제라도 보낼 수 있도록 작성하여 입력시켜 놓았다.
방으로 되돌아 오면서, 좀 전 처음에 오다가 끊어진 전화가 아까 모였던 자리에서 이번 달의 과제인 투묘/양묘에 관한 분임 토의를 한다고 연락하려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언뜻 떠 올라 그대로 수속 사무실로 향하였다. 역시 짐작했던 대로 갑판부의 승조원들이 전부 모여 앉아 열심히 자신의 의견을 발표하여 취합하고 있다.
일순 나만 빼어 놓고 진행하고 있는 그 분임 토의 현장에 들어서며 나도 모르게 소외감에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에게 전화를 걸어 알리려 했었고, 또 분임 토의에 내가 꼭 참여해야 한다는 규정도 없는 사항이니, 그렇게 섭섭한 마음을 가질 건더기는 없는 일이다.
이번 토의 사항에는, 내가 꼭 끼어서 할 이야기가 있다고 내 혼자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이 제외된 순간적인 입장을 보며 그런 마음이 들었겠지만, 그게 또 나이가 들어 느끼는 소외감의 일종 인지도 모른다는 강박관념마저 슬그머니 들어 마음을 어지럽힌다. 우선은 늦게 참석하게 된 변명으로 한마디 하고 내 자리를 찾아 앉았다.
투묘와 양묘는 닻을 다루는 같은 일이긴 하지만, 닻을 내어주는 것하고 걷어 들이는 반대의 차이가 있는 다른 일로도 볼 수 있기에, 투묘 시와 양묘 시의 안전수칙으로 구분하여 토론하도록 해야겠다고 작정하고 있었던 내 의중과 같은 방향으로 그들의 토론이 진행되고 있어 마음이 좀 편해졌다.
토의 중간중간에 내가 느끼고 있던 투묘에 관한 사전 준비 및 안전 사항에 대한 의견을 첨부시켜 넣어주면서 어쭙잖게 찾아들었던 소외감을 몰아낼 수가 있었다.
다음에 한 번 더 양묘 시의 안전수칙을 논의하기로 결정하고 오늘의 분임 토의를 종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