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한 인재를 부하로 계속 쓰고 싶어서
사진 : 대우 스피리트호에 처음 승선했을 때 이 복도에 들어서면서, 너무나 어수선하게 Storm Rail에 걸려있던 작업복 빨래와 지저분한 벽과 바닥의 모습을 보며 여기부터 청소하고 닦아 내리라 결심했었는데... 그래도 이 정도 손 본 것도 지금에 와 보면 꽤나 잘한 일이었다.
안녕하십니까? L 이사님.
저는 대우 스피리트호를 담당하고 있는 책임 선장 H.T J 입니다.
이렇듯 처음으로 이사님에게 소식을 띄우면서 서먹한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그저 현장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조금이나마 전해서 본선을 맡아 일하는데 도움을 받고자 하는 마음에서 이나, 이사님의 업무에 참조하는 의미로 받아주십시오.
사실 서로의 일하는 업무상으론 매우 가까운 사이로 여겨지지만 육상과 해상이라는 떨어진 근무 환경으로 인해 자주 접하는 기회를 갖기가 어려워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을 기회 역시 턱없이 모자라서 좀 소원(疏遠)하게 느껴지는 분위기도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아직 몇 년은 더 근무할 수 있다는 생각에 좀 안이한 생활을 해오다가, 이제 바쁘게 떠나야 하는 정리의 기간을 눈앞에 두게 되니 서둘러 유종의 미(有終之美)를 거두면서 떠나고 싶은 마음 또한 간절해지는 요즘입니다. 그간 본선의 책임 선장으로 근무한 지도 99년 6월 10일부터이니 어언 만 2년 줄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우스개 소리지만 <대우 스피리트>라는 단어의 의미가 형편없는 대우(待遇)를 받아야 하는 작금의 사회 현실에서, 그 이름을 고수하고 있는 본선의 책임선장을 처음 맡았던 입장에서는 천(賤)해진(?) 이름과는 달리 무언가 보여주고 싶다는 도전 의식조차 갖고 첫 승선을 했었습니다.
하나 현실적으론 본선에 승선 후 겪게 된 승조원들의 잦은 교체(交替)(특히 기관부 인원)로 인해 본선 정비 등의 일을 일관성 있게 진행시키기가 힘든 점도 많았습니다.
저희들의 힘든 고충점(苦衷點)을 알고 계시면서도 그런 방식의 인사 처리를 할 수밖에 없었던 이사님의 마음 또한 편치 않았으리라 짐작을 하기에 그저 묵묵히 받아들이며 그 안에서 최선의 길을 찾으며 지금까지 노력해왔습니다.
이제 저의 청춘을 바쳤던 선상생활을 떠나 마무리 단계에 가까이 다가서면서, 뭔가 보람 있게 남기고 떠날 수 있는 전통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미 노후선에 들어서게 된 본선의 나이 16세가 넘어서고 있는 형편이지만, 누구나 타고 싶어 지는 분위기 좋은 배로, 성능면에서도 자신의 나이를 웃도는 형편으로 만들어 주고 떠날 수 있다면, 하는 바람을 새삼 가져보는 요즘입니다.
배는 사람이 만들어, 사람들이 유지해 나가는 것이므로, 승선해 있는 사람들이 마음을 모두어 당면한 일을 순리로 꾸리고 헤쳐 나간다면 어지간한 어려움이나 일의 해결은 무난하리라는 믿음을 저는 갖고 있습니다.
저의 이런 소박한 꿈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드리려 이 서신을 드리는 바입니다.
이번 항차 회사의 결정으로 기관장님이 교체됩니다.
먼저 번에 책임을 맡았던 분이 다시 오시게 되어 그분과 협조하여 정비나 기타 일을 처리해 가면 수월해질 것으로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한편 갑판부의 중요 멤버인 일항사 H.J Yoon은 이번 항차 광양에서 하선하여 안전 재교육을 이수해야 하므로 교대가 확정되었습니다.
본선이 차차 항차인 6월 중 드라이 도킹하게 될 경우 본선의 제반 사정을 누구보다도 자세히 알고 있는 H.J Y 일항사가 교육을 이수한 후, 다시 승선하여 본선 수리에 임한다면 저로서는 천군만마를 얻는 것보다 더욱 쓸모 있는 명장을 얻은 삼국지의 어느 왕 같은 흡족함을 만끽(滿喫)할 수 있을 것이라 말씀 드릴수가 있습니다.
그는 저와 마찬가지로 99년부터 계속 본선에 연가 후 다시 계승을 해왔기에 본선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 노하우를 대대적인 수리를 시행하는 정기 드라이 도킹 작업에 이용할 수 있다면 회사로서도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가능하다면 그가 이번 연가 중에 안전 재교육을 받고 다시 승선할 수 있도록 배려 부탁드립니다. 당사자인 Y 일항사도 본선의 재 승선 요청을 받아들이는데 거부감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바쁘신 와중으로 이런 서신을 보내 번거롭게 한 점 사과드리며 항상 건강하고 즐거운 시간과 함께 하십시오.
여불비례 H.T.J
ps : 이 편지를 받게 되실 분과 나와의 인연은 해사 담당 이사와 현장을 지키는 선장의 입장으로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본다면, 대학 동문으로 내가 10여 년 이상 선배가 되는 입장이었다.
아무래도 해륙상 간의 의사소통에서 어쩌면 너무나 현장의 뜻을 도외시하는 듯한 육상부서 사람들의 그것도 자신들의 대선배가 지키고 있는 현장의 이야기에 좀은 등한히 대하고 있다는 느낌도 살짝 가지면서 써본 편지였다. 따라서 필요 이상으로 공손 하려 하였고, 쓸까 말까 와 보낼까 말까의 틈새에서 심적으로 받은 스트레스도 적지 않았다고 여겨진다.
그렇게 편지는 보냈었지만 내가 그렇게 나 원하던 일항사가 다시 승선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가 그가 선장으로 승진해야 할 시점이 도래했고 회사도 그 점과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승진시키려는 명단에 넣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 역시 부하의 승진할 길을 막으면서 까지 자신의 이해만을 북돋우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에, 그의 승진 이야기가 나왔을 때, 두말 않고 재 승선 요청을 취하하며 회사의 뜻에 극구 찬동의 뜻을 표명하였다.
작으나마 나의 Y 일항사에 대한 호의적인 믿음을 표했던 서한이, 생각지도 않게 그의 승진에도 좋은 추천이 되어 인사 청탁 이상의 도움이 되었으리란 심증도 드니 은근히 기분이 좋아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