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여유를 찾아주는 대화.
5박 6일간의 광양에서의 머무름도 어찌 지났는지 모르게 마음 바쁘게 지나가 버렸다. 이제 다시 출항 길로 들어선 아침이다.
도선사도 내렸으니 슬슬 속력을 올려서 앞으로 다가 온 보름간의 항해를 시작할 때에 맞추어 RUNG UP ENG.(장기 항해를 위해 기관을 올릴 만큼 다 올려준 상태로 더 이상 기관의 증, 감속을 사용하지 않고 최대의 일정한 속력을 유지한다는 뜻)하자는 이야기가 나올 때가 되었건만, 마침 울린 전화벨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기관을 세워서 수리를 한 후에 속항을 하자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어디를 수리해야 하려는 겁니까?
하는 물음에,
-F.O 고압 파이프가 또 터져 바꿔야 하겠습니다.
라는 대답이 올라온다.
-아직 좁은 해역을 못 빠져나왔으니 좀 더 나가서 해도 되겠지요?
-예, 새어 나오는 기름양이 적어 통에 받아 다시 주워 담고 있으니, 한두 시간 넓은 곳으로 나가는 건 괜찮습니다.
통화를 끝내며 이번에도 또 세워야 하는 일이 생기는 건가? 하는 좀 울적한 기분이 든다.
그런 마음을 풀어내려고 아직은 통화가 가능한 핸드폰을 꺼내 들어 아내의 전화번호를 돌려 본다.
아내는 우리 배를 떠나보내고 자기 동생과 함께 한나절을 지내고 난 후, 집으로 간다고 했었기에 아직은 광양을 떠나지 않고 있을 것이다.
핸드폰 특유의 잡음에 섞여 아내의 응답이 들리는데 점심식사를 하려고 옥곡을 찾아가서 메기매운탕을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던 중이란다.
-누구 하고 갔는데?
누구하고 갔는가를 뻔히 짐작하면서도 말을 잇기 위해 묻는다.
-정아네(처제)와 옥곡 아줌마랑, 그 집 남편 그리고 잘 모르는 한 사람이 더 있어요.
예상하고 있던 대로 처제와 함께 옥곡 집 차를 타고 간 것이다. 엊그제 구례 갔을 때 동행해 주었던 바로 그 차와 그 사람을 말함이다.
옥곡에 있다는 그 사람도 실은 대기업에 근무하다가 명퇴를 한 후, 옥곡에서 노후를 살겠다고 정하고 찾아온 사람이다.
-그래 점심 맛있게 들고 구경 잘 해 두어요. 혹시 이쪽으로 이사 오게 될지도 모르잖아요.
-알았어요. 당신은 지금 어디쯤 가고 있어요?
-난 지금 여수 앞바다를 빠져나가고 있어요.
-그렇군요.
아내가 자주 쓰는 독특한 응수의 말이다.
-자, 이제 전화를 끊겠어요. 그럼 집에 잘 가시고. 나도 잘 갔다 오겠어요.
-예, 당신도 잘 다녀오세요.
약간의 불편한 심기에서 걸었던 전화이지만, 이 정도의 대화로도 원하던 이상으로 마음은 많이 가벼워졌다.
그러기에 기관의 작은 고장으로 출항이 좀 늦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는 구태여 알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이야기는 아내와의 대화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오히려 걱정거리로 남아 서로의 마음에 앙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