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만 하다가 말게 된 노후 예정 이야기
전남 구례에 대지와 임야를 합쳐 약 700평 되는 땅에 주택도 한 채 지어져 있고, 석류를 주로 한 몇 가지 과일나무도 심겨 있어서 이제 수확도 가능한 곳이 매물로 나와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귀가 솔깃해졌다.
퇴직 후의 노후를 그런 곳에 정착해 살기를 원하던 마음이라 그 집을 구경하러 가기로 한다.
마침 광양에 사는 동서의 지인으로 나도 몇 번 만나 본 사람이 운전해 주는 지프차를 타고 찾아가기로 하여 길을 나섰다.
봄철이면 매화와 매실로 유명한 다압을 지나며, 섬진강을 옆에다 끼고 같이 달리는 강 양안이 모두 도로인 경치 좋은 길을 따라 차는 한 시간 여를 달렸다.
-저곳입니다.
손 끝따라 보여주는 곳을 향해 눈길을 돌려 멈추었다.
다리를 건너 마을의 전경이 눈 앞 가득 차는 그곳 얕은 언덕 받이에 찾아보려는 그 집의 빨간색 지붕이 보이고 있다. 마을은 깨끗하니 정돈된 모습으로, 조용히 누워서 한낮의 따뜻한 양광에 담백한 졸음을 즐기고 있는 듯 조용하지만 환한 표정이다. 포근히 와 닿는 그런 첫인상은 매우 한적하면서도 따뜻하고 감미로움을 느끼게 한다.
마을 뒤쪽에 있는 산곡의 저수지로부터 충분히 공급받은 물줄기가 동네 큰길 옆을 따라 시멘트 구조물로 정돈된 수로를 통해 깨끗하고 빠른 물이 되어 작은 물소리를 내며 흐르고 있다.
동네 전체로는 제법 많은 집들이 모여 있지만, 주위가 조용한 품새가 마치 숨바꼭질 놀이에 빠져 숨 죽이고 있는 아이들과 같이 달착지근한 긴장감을 보태주고 있다.
그런 소리와는 관계없이 하루 종일 하늘을 헤집고 있는 햇빛 때문에, 사방은 환한 빛의 소란함 속에 묻혀있는 듯하지만, 눈은 그래서 더욱 편안해지는 느낌을 주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도 쉴 새 없이 이야기를 거들던 지인이었는데, 마을에 들어서면서 차를 세울 때까지는 계속 입을 다물고 있더니 도착해서 차를 내릴 때 첫마디 일성으로,
-여기 같으면 하루 종일 밝아서 아주 좋습니다. 이쪽으로 이사 오도록 하세요.
적극적으로 이사 오기를 권하는 말로 다시 말문을 연다.
우선 해가 하루 종일 있으니 환하고 따뜻해서 좋고, 뒷산에는 소나무 숲이 있으니 더덕, 버섯, 난초, 등을 가깝게 구 할 수 있을 것 같아 좋다며 극구 이곳을 장만하여 내려와 살만 하다는 추천으로 이끌어 간다.
-이곳에 와서 자리 잡으시면 앞으론 저도 자주 찾아와 뵙겠습니다.
어쩌면 자신도 연고가 없는 외지에 와서 살고 있는 외로움 때문에 가까운 이웃을 만들고 싶어 하는 의중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말까지 덧붙인다.
먼저 집부터 구경하려 했지만, 마침 주인이 출타한 채 대문마저 잠겨있어, 그냥 밖에서 들여다보는 걸로 대신하기로 한다.
마당 가장자리에 놓인 트랙터의 모습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니, 문득 내가 차를 운전하는 면허증이 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이런 곳에 살려면 운전부터 배워 두어야겠지요?
하나마나한 이야기지만 잠깐 생각과 엉키는 말들을 뭉뚱그리려고, 발걸음을 떼면서 말 길을 열어 보게 한다.
탱자나무를 바자로 엮은 울타리를 빙 둘러 돌아보다가 담장이 끝나는 곳에서 돌미나리의 군락지를 만나는 순간, 앞으로 살아 볼까 집 구경 가 본 입장도 잊은 채, 아내는 돌미나리를 캐내 보느라 잠시 법석을 떨기도 한다.
몇 집 떨어진 어느 집의 담너머에서 한가로이 컹컹거리는 개 짖는 소리가 울려 나와서 한낮을 더욱 늘어지게 만들고 있다.
그곳을 방문하고 돌아 선 차 안에서의 생각은 어떻게 해서라도 계약을 이끌어 내어 내 집으로 만들어서 살아 볼까? 하는 마음가짐이 우세한 듯했다.
광양까지 돌아오는 중간 기착지인 하동에서 다시 옆길로 빠져 쌍계사 앞까지 올라가 한 곳을 더 들리기로 했다. 바로 화계 장터 앞을 지나쳐서 봄철이면 벚꽃 터널이 되는 길로 들어선 것이다.
거기서 언젠가 아내가 이야기하던 스님 같은 부부가 운영한다던 전통찻집을 찾아가기로 순간적으로 말을 맞춰 결정한 때문이었다. 혹시 지나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가지며 찾아간 곳에 그 찻집은 문을 열고 있었다.
마침 네 명의 손님이 차를 마시고 있었는데, 전통차의 취급을 가르치며 시중 들어주고 있던 주인 여자가 다가오더니 인사를 하며 차를 주문받는다.
몇 번씩 우려내어 먹는 차 맛이 처음이나 나중이나 꼭 같은 향을 유지하는 게, 다도는 잘 모르지만 다도를 생각하게 만들어, 일종의 경건한 마음으로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대게 만든다.
그 집을 찾은 아내의 목적은, 우리 부부가 없는 앞날을 고심해야 할, 약간의 신체적 장애가 있는 큰 애가 살아갈 방도로, 그렇게 목각도 하고 차도 팔며 자신의 취미까지 살리며 한적하니 살아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느낌을 예전에 그 찻집에서 받았었다는데, 그걸 나도 같이 느껴보라는 의미로 데려간 것 같다.
잠시 둘러본 내부에서 여러 가지 목각으로 만든 茶卓이며 다기가 모두 주인이 만든 것이라며 차와 같이 판매하고 있었다.
그 정도 같으면 자신이 운영하며 큰돈을 벌려는 욕심만 가지지 않으면, 생을 유유자적하니 살아가는 방편으론 안성맞춤이 되겠다는 생각도 든다.
단지 그렇게 입맛에 딱 맞는 장소를 찾아내는 게 쉽지가 않으리라는 것과 찾아낸다 해도 자금을 풍부하게 가지지 못한 형편이니, 맘대로 내 것으로 만들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일단 광양의 동서 집으로 돌아가서 동서도 함께 진지한 논의에 들어갔다.
지금껏 우리가 생활하던 터전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라서 앞으로 길게 보고 생활하기에는 외로움 때문에 어려울 것이란 의견이 우세해지면서, 그곳에 가서 살아볼까? 하던 생각은 차츰 밀어내기를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