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 비락
배의 속력이 빠르지 못해 늦게 다니게 되니까 그런 건지, 지난 항차도 여기 뉴캐슬에 왔었고 이번 항차에도 또다시 와서 투묘를 하는 연속된 항차 이건만, 다른 곳을 거쳐서 꽤나 오랜만에 이 곳을 찾아온 것 같은 느낌을 받고 있다.
밤이 되어 브리지에 올라갔다. 정박등과 함께 켜준 브리지 부근의 조명등 불빛이 많이 밝아진 느낌이 들어서인지 산뜻한 기분에 따스함마저 깃들여 찾아든다.
그간 PSC를 대비하여 열심히 정비할 곳을 찾아다니며, 꺼져 있던 선외를 비추는 등도 모두 사용할 수 있게 전구도 바꿔 주었고 페인트칠도 열심히 해 놓은 결과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처음 이 배에 발령받아 승선하던 날 느꼈던, 그 어두컴컴하고 지저분해 보이던 모습에서 이제는 제법 깔끔하니 단장된 것 같은 느낌까지 생긴 상황이 흐뭇하다.
그런 마음으로 갑판 쪽을 내려다보니 갑판 중앙의 오른쪽에 있는 조명등과 선수 마스트에 있는 오른쪽 위의 조명등이 불이 안 들어와 있는 것이 눈에 뜨인다. 어찌 된 것인지 당직 중인 3 항사에게 물으려고 불렀다.
하지만 그는 마스트에 게양한(주*1) 호주 국기가, 배가 물살 따라 도는 바람에 기류 줄에 꼬여지게 된 것을 풀어주려고 톱 브리지에 올라가 있어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있다.
할 일 없어져 재확인하려고 다시 내려 다 본 갑판 상에 있는 그 불들이, 이번에는 아무도 어떤 조처를 취하지 않았는데도 모두 불이 들어와 켜져 있다.
-선장 말이 무섭 긴 무서운 모양이지?
-예?
방금 톱 브리지에서 내려오고 있던 3 항사가 무슨 말이냐는 듯이 반문한다.
-아 저 등불들 말이야,
들어와 있지 않았던 갑판의 등불을 가리켜 설명을 해준 후 말을 잇는다.
-아까 불이 안 들어왔다고 너한테 알려주려고 했었는데, 지금은 슬그머니 들어와 있으니 선장의 말이 무서워서 그런 것 아니야?
3 항사는 농담의 말임을 알아차리며 웃는다.
하긴 일제 말엽 고향에 살던 어린 시절, 오늘의 일에 비유할 만한 전등에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나였다.
전기 사정이 나쁘던 시절이긴 했지만, 어느 날 어두워진 저녁 무렵 불이 꺼져 있던 전등에 전기가 들어오면서 불이 켜졌다.
사람들은 불이 계속해서 켜져 있을까? 하는 약간의 의구심은 가졌지만, 어쨌건 어둠이 밝혀지는 상황을 반가워하고 있었는데, 두 살배기 어린애인 나는 불이 들어온 전구를 보고는 대뜸 후후 불어 끄는 시늉으로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입김에 꺼지기라도 하듯이 불이 깜빡 나가는 바람에 곁에 있던 어른들이 모두 떠들썩 하니 한바탕 박장대소를 하게 만들었다는 일화이다.
이번에는 갑판 상에 스위치는 켜 놓았건만, 꺼져 있던 불이 내 언급이 나오면서 저절로 다시 들어온 셈이니, 옛날의 실력(?)이 아직도 녹슬지 않은 것이었을까?
주*1 마스트 게양기 : 선박이 외국 항구에 기항하면 제일 먼저 표시해 주는 인사가 기항국의 국기를 자선의 메인 마스트에 게양해주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