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이런저런 일로 바빠지기 마련인 출항 풍경
선적하는 하역 작업을 다 끝내고 출항만을 기다리는 편안한 시간이다.
일반적인 출항 시간이야 선적이나 양하가 끝나면 즉시 떠나는 게 원칙이지만, 선적 시에는 선적량을 최대로 만들기 위해 항내 조선간만의 조고가 제일 큰 고조가 되어가는 시간까지 기다리는 경우가 있는 데 지금 그런 형편이 되어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기상도를 통한 일기예보도 현재의 조용한 상태가 우리의 출항시까지 계속 이어질 것이라 보여 주고 있고 실제의 날씨도 구름은 많이 끼었지만 대기는 조용하니 맑아 있는 상태이다. 건너편 공장지대 BHP제철소의 굴뚝들에서 빠져들 나오는 연기의 모습은 제 각각이지만, 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양은 모두가 일정한 방향을 잘 유지하고 있는 걸 봐서도 바람의 세기도 크게 변화가 없는 양호한 상태이다.
이렇듯 모두가 출항을 기다리는데 적합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건만, 한 가지 출항에 결정적인 결격사항이 될 수도 있는 일이 아직까지 계속되면서 마음 졸이게 하고 있다.
삼항사가 어제 오후에 시드니에 유학 와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간다며 외출을 나갔는데, 오늘 오전 중까지는 귀선 하겠다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있어 은근히 걱정의 강도를 더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간 승선 중의 행동이나 평소 생각하는 거로 봐서 결코 이곳에서 도망갈(Jump Up) 친구는 아니지만 혹시나 길을 잃거나 시간에 제대로 대어오지 못할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어찌할 수 가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를 앞장세우며 괜스레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친구의 거처나 연락할 수 있는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갔다면 전화라도 걸어 보련만 아무런 연락처도 알려 주지 않고 갔으니 돌아올 때까지는 은근히 이 걱정은 이어가겠지...
아무리 연락을 하려고 해도 당장 연락할 길이 막혀 있다는 게 이렇게도 답답하고 초조할 줄은 이미 알았건만 새삼 이런 일에 대비하여 상륙하기 전에 철저하게 이야기해두지 못했는가를 후회가 되었다. 문득 옛 선인들이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이란 이야기로 왜 후세들을 훈육하려 했는지 이해가 간다.
이 이야기는 예전 내가 중학교에 갓 입학했을 때 한문 선생님 같은 분위기의 기하(수학) 선생님이셨던 담임선생님께서 제자들과의 첫 만남의 인사에서, 세상은 최소한 이런 예의는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훈육이 곁들인 이야기로 들려주셨던 첫 이야기였다. 나도 3항사가 돌아오면 이 이야기를 꺼내 들려주어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열 시쯤에 찾아온 대리점원과 함께 송화주를 기다렸다. 이윽고 나타난 송화주가 갖고 온 선적 서류와 함께 선하증권에도 오랜만에 서명을 하였다.
원래부터 선하증권의 서명은 선장의 고유한 권리이자 의무사항의 일이지만, 작업이 끝나자마자 떠나야 하는 현대의 선박 운항 패턴에서는, 선하증권에 서명하기 위해 일부러 배의 출항을 미뤄놓고 서류작성을 기다리지는 않는다. 따라서 평소에는 대리점에게 선하증권 서명권의 위임장을 선장이 써주고 떠난 후, 대리점장이 선장을 대신하여 서명하여 처리하는 패턴으로 운용하고 있는 것이다.
금항은 선적 작업을 끝내고도 무려 16시간이란 물때(조석간만)를 기다려야 하는 일이 생겼으니 아예 그 시간에 정식으로 선하증권에 서명해 달라는 요청을 대리점이 해왔기 때문에 125,982 M/T의 선적 석탄에 대한 선하증권에 서명을 하여 발급해 준 것이다. 선하증권이 당연히 유가증권이란 점 때문일까? 서명할 때 면 저절로 은근한 위압감 같은 책임감이 느껴지곤 한다.
우리 배의 선적 흘수를 최종적으로 검토하더니 대리점원은 출항시간을 다시 한 시간을 당겨진 1500시에 도선사 승선하도록 일을 처리하겠단다.
아직까지도 삼항사는 돌아오지 않고 있어 마음을 조금 더 조급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
-수고가 많으십니다.
실내 통로를 들어서며 인사하는 삼항사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동안 꽉 막혔던 숨통이 그 말소리를 들음과 동시에 뚫어지는 듯한 기쁜 감정이 앞서다 보니 왜 늦게 왔냐고 꾸짖거나 힐난할 생각은 아예 싹 달아나고 돌아와 준 것만이 감사할 뿐이다.
-왜 그렇게 늦은 거야?
그래도 대화를 시작하려니 묻는 물음에 3항사는 시드니에서 아침 식사를 하자마자 바로 떠나서 오는 길이란다. 초행길에 고생한 티가 팍 나는 대답을 한다.
-어서 출항 준비나 해!
아직도 몇 시간 남은 출항 예정 시간임을 확인하면서도 삼항사를 제 방으로 보내주었다.
오늘의 삼항사를 기다리며 고심했던 점은 나중 출항 후 시간을 가지고 출필고 반필면(出必告 反必面)과 함께 이야기해 주기로 작정한 것이다. 이윽고 새로운 예정으로 세워주었던 15시에 <총원, 출항 부서 배치 붙어! >의 벨이 울렸지만, 완벽한 사전 준비 태세로 이미 출항 준비에 임하고 있었기에 1506시에는 모든 라인(계류삭)이 걷어 들여지고 삼천포를 향한 출항은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Bottom Clearance(선저로부터 항내 바닥까지 높이 거리)가 2.4미터인 부두에서 중간에 1.8미터까지(*주 1) 줄어들었다가 다시 깊어지는 항구의 입구를 빠져나오니 약간의 너울이 살짝궁 쓰다듬듯이 우리를 흔들어 반기지만, 걱정할 만큼 나빠진 바다는 아니었다.
또한 아직 어두워지기 전의 출항이 갖고 있는 편안한 상태가 모두의 마음을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기에 근래 보기 드문 기분 좋은 출항의 기쁨을 만끽하는 떠남을 가질 수 있었다.
*주 1. : 당항차 뉴캐슬 항만에서 본선의 최대 선적 후 안전항행 수심을, 항로 중간에서 만나게 되는 Bottom Clearance가 1.8미터 되는 곳을 기준으로 정하여 선적하였기에 그 시간까지 기다려 출항하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