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서 만나다
조마드 항로를 빠져 나오고 이제 호주에 가까이 접근하면서 부터 국적선을 자주 만나게 되니 항해의 무료함도 달래주고, 서로의 정보도 주고받아 볼 셈으로 VHF 전화로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꾸도 없이 그냥 지나쳐 버리는 배도 제법 있다. 오늘도 수평선 저 멀리서 부터 가물가물 나타나는 배의 모습을 열심히 확인 해가다가 가까이 접근했을 때 보니 현대상선 배인데 이름은 무슨 글자인지 알 수가 없지만 석자 석자로 띄어쓰기가 되어 있어 국적선 일람표로 찾아보니 퍼시픽 빅토리라는 배가 맞는 것 같다.
뉴캐슬 대리점에서 텔렉스로 보내준 석탄 선적하러 입항하는 선박의 리스트로 확인해보니 13일 출항 예정의 배가 있었는데 그 배의 이름이 <퍼시픽 빅토리>이다. 날짜를 짚어보니 사흘이 지난 셈으로 모든 게 그 이름의 배와 합치되는 점이 많다. 아직 선체의 색깔만 겨우 오렌지 빛이란 걸 알만큼 멀리서 눈에 띄었을 때는 혹시 우리 회사의 자매선인 팬 야드는 아닐까 기대하며 한 번 불러 봤었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가 아니더라도, 그 소리를 들은 한국 사람들이라면, 벌써 전화기 앞에 나와 통화가 진행되었을 터인데 그들은 묵묵부답 한 채로 점점 가까이 오고 있었다.
마침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실습항해사가 안달이 나는 모양이다. 슬그머니 전화기를 집었다 놓는 행동을 반복한다. 이런 무응답으로 서로 스쳐 지나며, 제갈 길로 유유히 사라지는 국적선이 많이 생기는 현상이 요즘 들어 부썩 더 늘어나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예전의 마구잡이식으로 VHF 전화를 사용하던 무분별한 전파의 낭비성 사용의 틀에서 벗어나려는 바람직한 매너 때문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좀 더 세부적으로 보면 IMF 이후 새로이 생긴 풍조로서 어쩌면 회사 사정들이 좋지 않아지면서, 뽐 낼 거리도 없으니, 대화를 기피 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짐작도 해본다.
아무런 자랑거리도 없는데다, 보여 주거나 알리고 싶지 않은 일만 많아 아예 통화하기를 꺼려하게 되었거나, 아니라면 회사로부터 쓸데없는 말들을 초단파 무선전화로 떠들지 말라는 엄한지시를 받았는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예전에는 대양항해 중 만나는 배들은 모두가 반가운 이웃사촌 동료로 여겨져서 -한국선박, 감도 있습니까? 하며 배 그림자만 눈에 띄어도 대화를 시도하려고 서로 나서는 일이 빈번했다.
근래에 우리 해운의 역동적인 발전으로 보유 선박 숫자도 늘어나고 한국 선원의 진출도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는 상태이다보니 스치듯 지나치면서도 알은 채 해보려던 정겨운 만남의 기회는, 시끄럽거나 번잡한 인사치레를 기피하게 되면서, 그만큼 줄어들어 오히려 예전만큼의 반갑게 응대하며 주고받던 VHF 전화 통화는 줄어드는 형편이다.
하지만 특이한 경우로,
-한국 배 있습니까? 또는,
-한국 선박, 감도 있으면 응답 바랍니다. 하고 호출하는 소리를 듣게 되는 때가 있다.
그런 호출 소리에 응답하고 나서면 필리핀 선원들이 한국선원들의 말투를 흉내 내어 부른 것일 때가 자주 있다. 한국선원들과 혼승해서 근무한 경력이 있는 필리핀 선원들이 당직 중 장난치듯이 내뱉은 한국말 방송인 것이다.
그런 경우를 여러 번 겪게 된 한국 배(한국선원이 타고 있는)에서는 이제는 그런 식으로 호출하는 타선에게 제대로 빨리 응답하지 않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 배와 지나치고 한참 지난 후 통화가 되었을 때, 추측하던 나의 짐작과는 다르게, 그 배는 이른바 혼승선(주*1)으로서 선기장과 몇 명의 사관만 한국인이고 나머지는 모두 필리핀 선원으로 채워진 때문에 마침 우리가 호출했던 시간에 한국말을 잘 알지 못하는 선원들이 당직중이어서 우리가 불렀던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주*1 : 임금, 세금, 기타 운항경비의 절감을 위해 여러 국적의 선원들을 함께 승선 근무 시키는 선박으로 요사이 국내 추세로는 한국인 사관에 외국인 부원선원으로 충당하는 선박이 늘어나는 추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