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물 감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오늘은 벌써 11번째로 맞이하는 아버님의 기일이다.
1991년 5월 25일 상계동 집에서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하직하시던 그 날은 우리 집안에 크나큰 슬픔이 찾아들었던 날이지만, 마침 연가 중이라 집에 머물러 있을 수 있었던 나로서는 최대의 불효자는 그나마 면할 수 있었다.
늘 집 떠난 해상에서의 선상생활을 하는 입장이었지만 그 당시는 마침 연가를 받아 배를 내린 상태로 집에 있었기에, 아버님의 임종만큼은 내 무르팍을 아버님께 내어드리며 지킬 수 있었다는 사실이,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감사할 뿐이다.
영락 동산 묘원에 아버님을 모시던 장례식 날은 화창한 맑은 날씨였건만. 멍한 느낌에 온갖 어수선한 소리로 꽉 차 있는 것 같은 내 머릿속을 파고들던, 산골짜기 구비구비 돌아 내리며 메아리 되어 찾아왔던 뻐꾸기의 애절한 새끼를 찾아 자신을 각인시키려 한다는 울음소리는 지금까지도 종종 선명하게 귓속에 남아 들리는 듯하다.
그 울음소리는 아버님을 흙으로 돌려 드리는 예식에 참여한, 내 마음 가득하게 차 있던 애달픔을 토닥여 주면서도, 마치 이승에서 전해지는 아버님의 목소리인양 서러움마저 부추겨주는 것이다.
눈물로 퉁퉁 불어버린 눈을 더욱 눈부시게 만들어 주며, 내 잔등이에 한없는 따사로움 마저 전해 주던, 환하고 포근하게 비쳐주던 햇살 역시, 그 밝음과 따스함으로 인해 더욱 외로움에 흐느끼게 해주었었다.
그렇게 아버님과 헤어 진지 어언 11년.
어느새 강산이 한번 꿈틀 변해 버린 세월이 흐르면서, 아버님 살아생전에는 바랐던 일이지만, 사실 상상조차 못 하였던 사건들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돌아가시기 몇 년 전 어떤 우연한 기회에, 이산가족의 TV 상봉에 관한 아이디어를 방송 관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우연히 나누신 적이 있으셨다는데, 나중에 그것이 진짜 생방송으로 편성되어 나가며 헤어졌던 가족 들과의 상봉에 전 국민이 울음과 웃음으로 환호하게 되었을 때, 아버님께서는 자신 역시 이산가족으로서 그런 일에 작은 밑거름이 되었다는 사실에 자부심을 숨기려 하지 않으셨다.
그러신 아버님이 가지고 계신 또 한 가지의 비화가 있다.
1949년 8월 18일에 발생한 죽령터널-일명 똬리굴-의 여객 열차 사고에 관한 일이다.
그 터널은 처음 들어섰던 터널 입구를 나중에 빠져나가는 출구에서 보면 저 아래쪽으로 내려다 보이게 똬리 같이 산을 둥글게 휘감아 뚫려 있는 길이 4킬로 미터가 넘는 국내 최장의 철도 터널이다.
사고가 난 것은 서울발 안동행 중앙선 제505 열차가 죽령 터널 한가운데서 원인 모를 이유로 정거한 다음 증기기관차에서 마구 내뿜어진 석탄 연기로 터널 내부가 순식간에 아비규환 같이 되면서 미쳐 빠져나오지 못한 승객 중 100여 명이 죽고 다친 대형의 인명 피해를 낸 교통사고였다.
당시 모일간지의 기자이셨던 아버님은 그 사고의 현장에서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친지가 자신을 찾아와 급하게 전한 사고 이야기를 즉시 기사 화하여 요샛말로 특종을 하셨던 것이다.
그런 사고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가지지 못한 다른 일간지에서는 그 사고에 대한 기사는커녕, 사고 자체를 아예 모르고 있었으니, 아버님께서 근무하시던 신문만이 특종을 하게 된 것이란다.
그때만 해도 교통과 통신이 불편하고 미비한 사회 형편이라, 사고 관계자들이 그 사고를 축소 내지 은폐를 하면서 뒤치다꺼리를 할 수도 있는 형편의 사회 풍토였지만, 서울의 일간지에서 특종 뉴스로 세상에 알렸으니, 나중 교통부 장관도 꼼짝 못 하고 인책 사임하게 된 사유가 되었 단다.
아버님은 이런 일을 가지고 계속 자랑하시는 스타일이 아니시라, 이 이야기는 그분 살아생전에 딱 한번 우연한 기회에 들을 수 었었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두고 자식 교육 차 나에게 이야기를 하던 중 우연히 나오게 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아버지를 그대로 따라 하는 아들은 결국 아버지만큼만 되는 거란다. 아버지의 모든 것에 틀린 점도 있다는 걸 빨리 파악하여, 아버지를 넘어서야 그 집안은 발전하는 것이지.-
이야기인 즉 대략 이런 말씀을 청출어람이란 단어를 곁들여하셨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다.
오늘 아버님 기일을 맞이하며,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해 주셨던 아버님의 이 말씀이 새삼 떠오름은 내가 아버님을 아직까지도 넘어서질 못해서 일까?.
산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지만, 무심히 지났기에 모르고 지낸 경우도 많았으리라~.
靑出於藍靑於藍 氷水爲之寒於水. 푸른색은 쪽에서 나왔지만 쪽빛보다 더 푸르고, 얼음은 물로 이루었지만 물보다도 더 차다. [靑取之於藍而靑於藍 氷水爲之而寒於水].
荀子의 勸學 篇 첫머리에 나오는 공부를 독려하는 말이요, 스승을 능가하는 제자 되기를 염원하여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예전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무렵이었을까? 아버님이 나에게 생각하고 하신 말씀 중에 이 이야기들이 인용되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 일을 대할 때에,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서 아버지를 닮아내고 따르기만 한다면, 기껏해야 아버지만 한, 아버지 정도의 사람밖에 안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모든 점에 있어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형편에 이르도록 노력하는 일처리로 세상을 살아갈 것을 강조하셨던 것이다.
아버지께서는 스승의 자리에 자신을 넣으시어, 고등학생이 된 내가 더욱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면, 아버지가 하는 일이나 행동을 맹목적으로 따르려고만 하지 말고, 아버지가 행하고 있는 생각이나 행동보다 더 나은 생각이나 행동도 세상에는 꼭 있다는 것을 명심하면서 그런 점을 스스로 찾아내고 계발하면서, 앞으로 나아가야만, 아버지를 능가하는 발전한 삶을 살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셨다.
결국 아버님 자신은 쪽으로 남더라도 나는 더욱 푸르게 원하는 때깔로 태어나게 되는 쪽물 감이 되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처음에는 그저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라는 말로 포장한 부모가 자식에 대해 이야기하는 마치 잔소리라도 늘어놓는 것처럼 여기며, 당연한 관심이라는 식으로 치부하며 받아들였던 듯싶다.
그러나 그때를 생각해 낼 때마다 조금씩 덧 붙여지는 靑出於藍이란 단어의 뜻이 쪽물을 들일 때마다 더욱 새롭게 짙어져 보이는 형편을 염두에 두시고 하신 말씀이 아닐까? 이 고사성어를 볼 때마다 아버님이 생각나고 그리워지는 심정 새삼스럽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