흘러가는 1997년

어느새 20년이 다되어가는 옛날 이야기

by 전희태
유일의피추월선1.jpg 대양을 항해하는 너무나 작아 보이는 선박

게으름을 피우며 차일피일 미뤄왔던 실내 청소를 진공소제기를 한바탕 밀고 다니는 것으로 간단히 끝내었다.

실내 바닥이 깨끗하게 비쳐 보이니 한결 깨끗한 것 같아 보이긴 하지만 전체적인 정리 정돈은 아직도 미흡한 몇 군데를 남겨두고 있다.


1997년의 연말.

섣달그믐 날의 일과는 그렇게 시작하면서 맑고 푸른 하늘의 아주 좋은 날씨로 맞이하였다.

우리 배보다 며칠 먼저 들어와서 정박지에 투묘중이고 어제 접안할 예정이던 뉴OOO호가 오늘 아침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 통신사들의 미팅타임에 나가서 들어본 소식에 의하면 본사로부터 대리점에 송부해야 할 선용금의 전도가 아직 되지 않아서 입항이 지연됐다고 하더란다.


우리 배에게는 1월 6일 접안으로 계속 통보 하는 걸 보면, 우리와는 별 관계가 없는 이야기이지만 그래도 같은 회사 배로서 같은 대리점을 이용하는데 그 배는 안 되고 우리 배는 괜찮다는 이야기가 아무래도 찜찜한 기분을 남겨준다. 앞으로 3-4일은 계속되는 연초의 휴일이라 그 배의 입항이 그만큼 늦어지는 게 어쩌면 우리배 스케줄과 비슷해지지 않을까 우려되는 상황인데 관계자들은 어찌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아침나절 환하게 밝고 투명한 날씨를 보이던 기상이었는데, 한낮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바람이 세게 일면서 백파가 희끗희끗 바람꽃 되어 해면 가득 피워주려 한다. 밀려온 파도에 의해 앵카 체인에 미쳐진 장력으로 뱃머리가 바짝 당겨졌다가 다시 반대로 돌려주는 일을 반복하니 머리가 띵하니 기분 또한 저조하다.


후부 갑판에서 열심히 담가보는 낚시도 조황이 좋지 않다. 그 동안에는 초저녁이 되면 나아졌는데 오늘은 그럴 기미를 전연 보이지 않고 계속 불어주는 바람 때문에 어장 철수가 빨라 질 것 같다. 저녁 식사가 시작 될 무렵, 모두가 철수한 어장에서 마지막까지 지키고 있었던 보람을 그렇게라도 보상 받은 것인지, 월척이 넘는 커다란 도미 한 마리를 낚아 올린 기관수가 너무 좋아서 아직 입을 뻐끔거리는 녀석을 그릇에 담아 들고는 소식 듣고 후부갑판으로 모여드는 동료들에게 일일이 낚아 올린 설명을 자랑삼는다.


몇 사람이 더 그 신나는 장면에 유혹되어 낚시에 다시 나섰지만 기쁨은 거기까지로 끝나고 있었다. 그렇게 한 마리만 올려 주고 잠잠해진 조황은 오늘의 낚시를 전면 휴업으로 몰아넣었다. 육지 사람들과 초면 인사라도 나눌 때 우리를 뱃사람이라고 소개말을 시작하면, 대부분의 그 분들 다음 질문은 ‘생선은 원 없이 잡아먹겠지요?’이다.


마치 바다 위에서 살고 있으니 당연히 고기를 잡아먹을 거라는 생각이 비쳐진 거지만 실은 우리 같은 상선 선원들은 고기잡이가 주 임무가 아니므로 그런 질문에 매번 아니라고 대답하며 설명해주기가 당혹스러운 것이다. 이럴 때 떠오르는 모습이 오늘 같이 정박 중에 취미삼아 낚시를 하여 잡아 올린 고기를 먹는 게 모두인데 하는 대답을 속맘으로 하는 거다.

-정박대기 중에 낚시를 할 때면 늘 생각나는 정황인데 오늘도 예외 없이 떠올랐다 가기에 적어둔다.-

어느새 완전히 어두워졌다. 뉴캐슬이 있는 하늘 아래서 불꽃이 찬란하게 떠오르는 게 보인다. 송년과 신년마지 행사인 불꽃놀이가 시작되는 모양이다.


집 떠나 배타는 선원들이 스스로를 가장 쓸쓸한 사람이라 느끼게 만드는 그런 행사가 이런 불꽃놀이이지만 나에겐 오래전에 그런 씁쓸함을 이겨낸 독특한 불꽃놀이 경험이 있다.

70년대 초반이었다. 인도네시아 원목을 실으려고 칼리만탄섬(보르네오) 타라칸 항에 기항했을 때였다. 마침 지금처럼 정초였고 작업도 없는 상태라 정박 중인 배안에서 지내야 했다.

섣달 그믐날이지만 한적한 촌 동네라 불빛도 별로 안 보이는 시내를 바라보다가 불현 듯 제야의 불꽃놀이가 떠오르며 기발한 생각은 구명정용 신호탄에 까지 미치게 되었다.


당시 배안에는 유효기간이 넘어 폐기 처분해야 할 구명정용 화약류의 재고가 시나브로 쌓여가고 있었다. 아무데나 함부로 버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니 그 밤, 몇 시간 안에 적당량을 폐기 처분하리라 작정한 것이다.

평소 구명정 비품으로 있는 이들 화약류의 쓰임새와 사용법은 전승조원이 안전교육을 통해 알고는 있지만, 직접 사용해보는 기회는 거의 없기에 선원들에게 구명신호 화약류를 실제 사용하는 실습을 한다는 의미를 부여해가며 창고에서 꺼내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쏘아 올린 오렌지색의 구명 불꽃으로 그날 타라칸 항구의 밤하늘은 한 번씩 환하게 빛났고 우리는 집 떠난 외로움을 이겨내는 환성을 지르며 신년 축하를 서로 나눌 수 있었다. 이 모든 일이 호랑이 담배 피우든 시절의 인도네시아였으니 가능했던 일이었지 지금 정박 중인 이곳 호주 뉴캐슬에서는 결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혹시라도 그런 일이 발생 한다면, 당장 해난사고 처치를 위한 헬기가 뜨고 구명 방화정이 나타나는 소동이 틀림없이 벌어지겠지~.


그냥 예전의 불꽃놀이를 머릿 속에 띄워 올리며 뉴캐슬 밤하늘 불꽃쇼에 동참하는 동안에....

아아! 1997년은 저물어 저물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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