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한참 깊었습니다

같은 편지를 또 정독하는 마음

by 전희태


DSCF0081(8468)1.jpg 동승 중에 아내가 수를 놓아 만든 성모마리아 상본.

보이소

밤이 한참 깊었습니다. 늦게 잔다고 어머님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기도 끝내고 샤워하고 방에 들어오니 1시 30분 피곤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당신이 띄운 편지를 생각하며 펜을 들었습니다.


안녕하신지요.

저는 이렇게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요즈음 회사 갔다 오후 4시경이면 집에 돌아옵니다. 초등학교 후배가 건강이 좋지 못하여 5시 묵주기도를 하러 갑니다. 다른 생각은 모두 접어두고 우리 때 일을 생각하며 열심히 기도하러 다니기로 했답니다.


벌써 몇 년이 지났군요. 큰 애가 아파 있을 때 우리 구역의 자매님들이 9일 기도를 위해 두 달이 넘는 기간 동안 매일 같이 우리 집을 찾아와 기도 해주던 때가 말입니다.

그런 여러 사람들의 기도 덕분에 큰 애도 무사히 그 큰 병마를 이겨내어 건강한 몸으로 우리 곁에 남아있게 되었다고 믿고 있으니, 이제는 그때 받았던 기도를 필요한 사람을 위해 돌려주어야 할 때가 된 거라 여겨집니다.


H약국 약사 부인(잔디 엄마 사촌동생)도 많이 안 좋다고 하는데, 자기 병명도 가르쳐주지 않고 사람들도 만나지 않는다고 교우들의 걱정이 대단한데, 소문으로 마지막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다고 하는 것만 듣고 있습니다.

저더러 형님이 이야기하면 마음을 열어 줄 것이라고 한 번 같이 가자고 하는데, 환자 자신의 마음이 중요하지 그 어떤 사람도 대신할 수 없는 것을.... 그래도 일간 찾아가 만나보렵니다.

약국도 팔았다고 하는데 그 형제님과 자매님도 걱정이 됩니다. 우리들의 기도가 그 사람들 마음에도 닿았으면 합니다.


보이소,

이런저런 소식에 접할 때마다, 사는 날까지 이제 우리 모두 건강하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막내 녀석 새삼스레 공부하겠다고 책 사서 보내 달라고 편지를 했더군요.

큰애는 부탁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책방에 가서 책을 사고 CD를 굽고 정성이 대단합니다.

둘째 역시 열심히 직장에 충실하고 혹 점심은 우리 둘이 같이 먹기도 합니다.

그리고 내일(토요일)은 동서하고, 인O이 엄마 가게(십자수)에 개업식 할 때 못 갔으니까, 한 번 가보기로 했습니다.


참! 회사에서 전화 왔었다고 했습니다. 중국 가는 것 때문에 월요일 전화해 달라고 했다더군요.

금감원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습니다. 그것도 월요일쯤 다시 전화해 보려고 합니다.


제가 바빠 보이죠? 그냥 그래요. 참 토요일에 일이 또 있군요. 정O이네 가게에 가야 합니다. 가게 사람들이 궁금하게 생각하니까 가서 얼굴 보이고 일도 보고 해야죠.


자. 당신 마누라 열심히 살고 있죠? 모든 일 , 우리 모두 열심히 해 봅시다. 첫째도 건강, 둘째도 건강, 셋째도 건강입니다. 그리고 사랑도 열심히 합시다.

0년 0월 0일 당신 마누라 BB



아내로부터 온 편지를 한 밤중에 다시 한 자 한 자 꼼꼼히 읽어 보기로 한다.

새벽 시간 조용한 때에 쓴 편지라 나도 같은 환경에서 읽어야 혹시 놓치기 쉬운 행간에 숨겨진 뜻을 찾아내기가 쉽다고 생각해서다.

이미 받자마자 읽었던, 컴퓨터를 통한 규격화된 글씨로 쓰여 있는 내용 이긴 해도, 사실 조용한 밤중에 다시 정독으로 읽어가면, 처음 읽었을 때 놓쳤던 아내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되어 오는 느낌을 갖게 하는 게 기분 좋은 것이다.


남의 기도를 받아 위안과 평화를 얻었던 감사한 기억을, 이제는 다른 이들을 위해 마련하려는 아내의 마음이 마냥 고마울 뿐이다.


처음 듣는 사람에겐 소음일 수도 있는 기관의 연속적인 쿵덕대는 운전의 소리이지만, 이제는 자리에 들어 새벽 기상에 무리를 주지 말라 재촉하는 자장가 마냥 조용하게 내 귀속으로 찾아온다.


-그래 안녕, 잘 자요. 나도 잘 꺼요. 자리에 들며 혼자 중얼거려 본다.

아무리 크게 외친다 해도 결코 들릴 길 없는 머나먼 거리이지만, 조용히 읊조리는 이 인사도 간절한 두 사람 간의 텔레파시를 타고 아내의 꿈속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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