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사 행불행
각부서의 스태프들이 만들어서 내어 놓은 청구서를 건성으로 검토하여 승인한 후 그대로 회사로 보냈는데 그 청구량에 문제가 발생했다.
제대로 다 잘하겠거니 믿고 서명해 준 그 청구서에서 중국 기를 세 매나 청구한 것이라든지, 작년부터 이번까지 40여 개의 라이프 재킷을 청구한 일은, 사실 회사의 입장으로 보면, 본선에서 너무나 무성의하게 청구서를 남발한 케이스로 밖에 인정할 수가 없겠다.
내가 너무 밑의 사람의 말만 믿고 있었다는 셈인데 한 번씩 이런 일을 당할 때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체크해야지 하면서도 막상 일이 닥치면 적당히 넘어가 주던 내 게으른 속성이 이번에 또 이런 낭패를 당하게 만든 모양이다.
그래! 다음부터는 선내 서류 작성 시 좀 더 철저히 일의 마무리를 지어가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며 회사의 지적 사항을 면밀히 검토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서류 정리를 모두 끝내고 회사 이멜과 같이 들어와 있든 큰애의 편지를 펼쳐 본다. 쓰기는 어제이지만 전해지긴 하루 늦은 오늘에 받은 그 편지를 보낸 날짜의 파일란에 넣어 보관하기로 한다.
아버지 보십시오.
아버지 장마가 깊어 가고 있습니다. 오늘은 온종일 비가 오네요.
요즈음 제 고교 동창인 W가 집에 와서 자고 가곤 합니다. 대리운전을 하느라 밤엔 못 자고 낮에나 겨우 눈을 붙이는데 차에서 자는 게 힘겨워진 모양입니다.
그 친구의 어머니와 형님들 모두가 미국에 이민을 간 상태이기에 혼자서 생활하느라 많이 힘든 모양인데 그런 W를 보면 우리 집이 얼마나 행복한지 느낄 수 있답니다.
그 친구네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마자 집안이 풍비박산 나더니 힘든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끼리 재산싸움이 벌어져 결국 그 기업을 다 거덜 내고 서로 남보다도 못한 처지가 되어 살고 있는 것을 보니 요즘은 불쌍해 지기까지 합니다.
남의 불행으로 우리의 행복을 느낀다는 게 좀 미안한 마음이지만, 자기 자신만 제일로 알던 놈인데 불쌍한 형편이 되고 보니 그나마 남아있던 친구도 다 떠나 버리고 비빌 언덕이라고는 대부인 저 밖에 없으니... 제가 귀찮다고 좇아낼 수도 없는 일이지요.
할머니는 좋아하지 않으시지만, 지금도 피곤에 절은 얼굴로 겨우 점심을 먹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이 시기가 자기반성을 하는 기회라도 되면 좋을 텐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라 곤 기도하는 것뿐인데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알아주었으면 하지만 자신이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음 또한 알고는 있는지....
안 그래도 비가 오는 데다가 기분까지 우울해지게 생겼네요.
아버지 이만 쓸게요. 기분이 꿀꿀-은어입니다- 해져서 더 못 쓰겠어요. 그냥 아버지와 대화하듯이 편질 하면 기분이 좀 나아질 줄 알았는데, 죄송해요 아버지 좋은 소식만 전해드려도 뭐 할 텐데.
다음엔 즐거운 소식 가지고 찾아뵐게요.
01년 06월 00일 큰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