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가 잘 되던 날

그래도 일이 술술 잘 풀리던 날

by 전희태
INMARSAT-A(9257)1.jpg 인공위성을 이용하는 통신기구Immasart-A.(현재는 거의 없어진 모델)


기다리고 있던 KS WEATHER로부터 추천 항로에 대한 이야기가 왔다. 내가 은근히 걱정스레 여기며 코멘트해 주길 바랐던 저기압에 대해서는 크게 신경 쓰지 않은 언급을 하며 그냥 먼저 권고해 준 항로대로 항행하라는 추천으로 왔다.


가는 동안 만날 바람도 센바람이 아니라 최고가 뷰포트 스케일 5~6급의 바람과 2미터 정도의 파도라니 그 정도 같으면 아무런 걱정 안 하고도 만나줄 수 있는 기상 상황이 아닌가?


밤새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좀 풀리면서, 이제는 빨리 달리기만 하면 되는데 하는 바람을 가지고 현재 속력을 알아본다. 10노트의 속력으로 달리고 있다. 어느 정도 역조의 조류를 벗어나기 시작한 모양이다.


이제 속력이 나아지는 추세이니 열심히 달리면 되겠구나! 한시름 놓는데, 기관장이 작업복을 입은 채 찾아왔다. 그런 차림새로 날 찾아온 용무가 있다는 건, 별로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걸 뜻할 수 있어, 무슨 일로 왔느냐니까 연료유 고압 파이프가 파공되어 기름이 새어 나오므로 기관을 정지하고 파이프 교체를 해야겠다는 이야기를 한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달려서 걱정스레 지켜보고 있는 저기압이 열대성 폭풍을 거쳐 태풍으로 커지는 영향권에 빠지지 않게 달려도 시원치 않은 마당에 배를 세우고 수리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니 속에서 작은 짜증이 슬며시 솟아난다.

그렇지만 그게 어디 기관장만의 잘못으로 그런 건가? 하여간 심술이 나는 심정이지만, 현실만큼은 인정 안 할 수 없어 배를 세워 수리하도록 허락을 한다.


30분 정도 세울 거라는 말만 믿으며 최소한 그렇게 해줄 것을 기대하며 브리지에 전화를 걸어 기관정지 요청이 오면 그대로 따르도록 지시해주었다. 10시 50분쯤 주기관의 정지가 실시되었다.


10여분이 지날 무렵 이제 슬슬 브리지에 올라가 볼까 방문을 나서는데, 배에 가벼운 진동이 온다.

아무래도 엔진이 재시동되는 느낌이 들어, 방으로 되돌아가서 즉시 브리지에 전화를 걸었다.

수리가 끝나서 다시 엔진을 스타트시켜 RPM을 올리는 중이라는 대답이 온다. 그야말로 초고속으로 수리를 끝낸 것이다.


휴우-- 한숨 돌리며 기대한 것 이상으로 빨리 끝내 준 수리팀에 감사한 마음을 품으며 이번에는 기관장이 부탁해 온 긴급 청구서를 생각해내고 통신실로 가서 컴퓨터 앞에 앉아 회사의 호스트 컴퓨터로의 연결을 시도한다.


어제로 끝난 월말과 상반기에 보내야 할 커다란 보고들은 이미 엊저녁 E-MAIL로 다 보냈지만, 너무 많이 오버해서 청구했다고 회사로부터 취소된 긴급 청구서를 대신하여 그야말로 꼭 필요한 사항을 찍어 보내려고 밤새 새로 조사하여 만들어 낸 청구서였다.


전화를 거는 순간까지는 삐삐 거리는 소리를 내며 잘 되어 가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연결이 안 되고 똑같은 기계음만이 연속하는 일이 계속 이어 진다.

처음에는 다음번에는 걸리겠지 기대하며 재 시도를 했었으나 계속 꼭 같은 일이 반복하게 되니 혼자서 속을 끓이다가 결국 3 항사를 내세워 직접 전화 거는 것까지 시도하였지만 이 역시 실패하였다.


일단은 좀 쉬면서 생각해 보기로 하고 그대로 덮어두고 점심 식사를 끝내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한 구석에 남아있어 초조감에 오후 들어 다시 걸어 보았지만 역시 똑같은 현상이다.

처음에는 금산 지구국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여 영국의 GOONHILL 지구국을 통 해 걸어 보았지만 역시 변함이 없다.


이제 고장은 지구국에서 난 것이 아니고 우리 회사의 컴퓨터이거나 본선의 발수신 장비인 INMARSAT-A 중에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할 판이다.

혹시나 위성안테나가 굴뚝에 가려진 때문에 위성을 잡는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닐까? 그쪽까지 점검해 보려고 배를 돌려본다.


한시라도 바삐 북상을 해야 하는 입장을 무시한 채, 선수를 오른쪽으로 50도가량 틀어 준 후 재시도했으나, 변함없이 종전과 같은 무반응을 이루고 있다.


마지막으로 장비를 껐다가 다시 켜주는 방법을 써 보기로 마음속에 작정을 하면서, 그전에 비디오 화면을 다시 한번 자세히 살펴보기로 했다.

그동안 싼 할인시간을 찾아 인도양 위성과 태평양 위성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도록 입력사항을 바꿔주는 과정에서 혹시 바꾸지 말아야 할 항목을 바뀌게 한 것은 없을까? 살펴 보기로 한 것이다.


아! 있어 보인다. 아무래도 저 항목의 숫자가 <0> 이어야 하는 것 같은데 <1>로 되어있는 게 이상해 보인다. 저것이 잘못 입력되어 제대로 작동을 하지 않았던 것이라 여기고 얼른 고쳐 입력해주고 컴퓨터 앞으로 다가가서 E-MAIL을 연결해본다.


전화를 거는 소리에 이어 연결되면서 내는 고유의 기계 음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아! 잘못되었던 것이 바로 잡히어 이제 제대로 작동하는 것 같구나! 마음으로 응원을 보내는데 드디어 파일을 열더니 제대로 송신을 시작한다.


아아 해결되었어!! 고함치고 싶은 마음을 억제하며 제일 먼저 한일은 얼른 브리지로 전화를 걸어 당직 중인 일항사더러, 저녁 식사 후에 같이 고장 개소를 찾아보기로 약속했던 2 항사가 지금 갑판 산책 운동을 하고 있으니, 얼른 2 항사에게 소리쳐서 수리가 끝났다고 알려주라는 당부의 말을 전한 것이다.


그동안 배도 속력이 10.8노트까지 올라가며 제대로 달리기 시작하고 있으니 우려했던 저기압도 아직은 우물쭈물하며 움직임이 둔화되어 우리에게 큰 영향을 끼치지 않고 북상할 것으로 나타나는 기상도까지 나와서 한결 더한 기쁨과 안심을 안겨주고 있다.


그러나 태풍을 향한 미진한 두려움은, 왜 그런지 계속 뽀얗게 갈아 앉는 바가지 속의 감자 전분 마냥 내 마음 한가운데로 모이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PORK HEDLAND-잘못 썼던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