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심한 사람 같으니라고!

태풍 일과 후의 편안함을 즐기며

by 전희태
황천-11.JPG


날이 밝아 오고 있다. 밤새 태풍이 지나쳐 간 바다 위로 날이 밝아 오고 있는 거다.

엊저녁, 조금 더 정확히는 오늘 새벽 한 시쯤 까지도 벼락 치는 소리보다도 더 커다란 굉음을 무섭게 내며 온 선체를 두들겨 주던 삼각파도가 휩쓸던 바다였는데, 지금은 그 모든 파도가 잠들어 버린 듯 다듬어진 해면이 되면서 태풍 일과 후의 누렇게 탈색된 너울들의 조용한 춤을 보여주고 있다.


태풍이 다가오던 몇 시간 전부터 시시각각 부르짖던 가지가지의 소리였건만 이제는 흔들림도 함께 거두어 주는 낮아진 파곡을 헤치면서 기분 좋은 해먹의 유연해진 움직임 닮은 선체 운동으로, 며칠간 설쳤던 잠 마저 보상받은 피곤을 떨어낸 모습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던 것이다.


우선 갑판상 모든 구조물에 가해진 파도로 인해 변형된 부위나 유실된 물건들이 있는지 살피도록 하면서 더불어 선내 모든 탱크를 측심하여 이상 여부를 살펴 즉시 보고 하도록 과업지시를 한다.


그리고 태풍 일과 후의 편안함을 즐기면서 별다른 연락이 없는 집 식구에게 내 설움(?)에 겨운 불평 어린 편지를 쓰기 시작한다.



무심한 사람들 같으니라고!

내가 소식을 전하지 않으면 그쪽도 주머니에 손 넣어두고 기다리는 그런 사람들인가요? 아니면 오히려 내가 너무 무심해서 서로의 소식이 끊긴 건가요?


지난 30일 당신한테 보낸 편지에 썼던 태풍 이야기가 이미 내가 집에 가는 길목에서 한 번쯤은 닥쳐와 만나게 되리라는 불길한 예감을 가지고 기상도를 보면서 누구 말처럼 기분이 꿀꿀해서 썼던 이야기였는 데, 그런 내 우려 섞인 심정을 눈치 못 채고 그냥 넘겼던 건가요?


그다음 날인 1일부터 오늘 이 편지를 쓰는 순간까지, 금년 들어 네 번째로 태어난 태풍 UTOR라는 녀석과 계속 숨바꼭질을 하면서 지내 오느라, 사실은 편지 쓸 여력이 없었던 거지요.


엊저녁 한밤중에 가장 가깝게까지 쫓아왔었지만 다행히 지금은 제 갈 길로 갔기에, 녀석이 휘저어 놓아 색깔 조차 희뿌옇게 변한 바다를 빠져나오느라 흔들리는 파도를 헤쳤지요. 다행히 이제는 위험한 고비를 넘긴 거라 편지 쓸 기분이 되살아 나 이렇듯 편지를 쓰고 있는 거지요.


속으로는 이런 때 편지라도 써서 부치면 어디가 덧나나 하는 구시렁거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쓰는 것이니 좀 귀에 거슬리는 말이 있더라도 참아 보시라고요.


자나 깨나 불조심이라 더니, 자나 깨어 있으나 태풍 생각만으로, 모든 일을 뒤로하고 녀석과는 만나지 않고 멀리 떨어질 궁리만 하느라 다른 생각 할 겨를이 없었던 거고, 그럴 때 집에서 온 편지는 좋은 위문과 위로가 될 수 있으니 기다려 봤던 거고, 다 그렇고 그런 거죠 뭐.


지금도 16만 톤을 넘게 철광석을 실은 우리 배를 굼실거리게 만들며 어떤 때는 한 번씩 신경질 난 형 녀석이 주먹으로 동생 머리 쥐어박듯이 허옇게 일어난 파도로 우리의 뱃전을 한번씩 두들겨 주곤 달아나듯 사라지고 있다오.


또 녀석은 보통 태풍처럼 비를 왕창 몰고 나타난 것이 아니라, 열대야 뺨치는 무더운 습도와 함께 엉긴 후덥지근함과 더위를 곁들여서 온 걸로 봐서는 땀으로 인한 끈적끈적함을 선물로 주려고 일부러 찾아왔던 것 같군요.


지금은 대만과 필리핀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는데 그냥 쭈-욱 가면 홍콩이니, 녀석 편에 홍콩에 사는 당신 시누이네 한테 안부나 전할걸 그랬나. 상상해보곤 웃습니다.


엊저녁부터 가깝게 다가와서는 한차례 우리 배를 두둘겨주어 무서움에 떨게 하더니 이후 계속 멀어져 가며 세력도 약해지고 있는 잊어야 할 사이로 녀석을 기억하기로 합니다. 구태어 친할 필요가 없는 바람이니까요.


집요하게 다가서던 태풍을 무사히 뿌리친 우리 배는 오늘은 오키나와의 서쪽을 향해 북상 중입니다.

그간 집에서의 사건이나 이야기들은 어찌 되어가고 있는지요? 어머님도 건강하시고 아이들도 모두 잘 지내고 있는지요?


장마철로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귀찮기만 한 세월이지만 짜증은 부리지 말고 살아갑시다.

차항이 완전히 결정 났어요. 중국에서 수리가 끝나면(약 25일간) 다시 광양에 와서 연료유를 싣고 캐나다 로버츠 뱅크를 향할 예정이라오. 돌아올 곳은 광양이고요.


이번 승선시 집의 고추장이나 뭐 그런 거 가져오세요.

아직 먹어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지만 내방에 매실청 담아 놓고 간 것 너무 잘 익어서 당신의 추천 음료로는 제격이 될 것 같군요.


또 배에서 걷기 운동하는 붐이 일어나서 만보기 주문이 여러 대 들어왔는데, 내 것 같은 것 2개와 요전에 사 왔던 거와 닮은 것 2개를 사 오세요. 각각 3만 원 2만 원에 판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그래도 좋다더군요. 그렇다고 장사하려는 건 결코 아니고요 사온 값에 넘겨줄 생각이랍니다.

7일 오전 광양 입항 예정이오.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당신 소리를 맡아보고, 냄새는 듣고 싶어 하는 남자가 보냅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꽝하는 굉음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