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갯속의 안정감

안개가 겁나는 일도 되는 건데...

by 전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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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항해하면서 가장 싫고 무서워하는(?) 일 들 중에 안개와 황천이 있다. 이중 안개는 대부분 바람이 없고 잔잔한 정적인 날씨의 상황이 많고 또 눈으로 직접 볼 수 없는 게 문제이지만, 황천은 모든 걸 흔들어 대며 정신을 빼는 그런 형상으로 다가서곤 하는 동적인 파워가 겁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동적인 폭풍만이 더욱 무섭고, 잔잔한 가운데의 안개는 좀 쉽고 편한 것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물론 배의 정적인 움직임이 선체의 응력에 미치는 영향이야 덜 위험하겠지만, 보이지 않는 가운데 앞에 있을지 모를 항해 장애물(타선박이나 미확인 물표 등)과 원하지 않는 충돌이 발생하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살펴야 하는 신경전 때문에 오히려 더욱 초조한 불안감에 젖게 만드는 안개가 어느 면에서는 더욱 겁나고 싫은 것이다.


오늘도 밤 12시가 넘어가고 있는데 아직까지 잠자리에 들지 않고 서성이다가 습관적으로 커튼을 살짝 들쳐서 창 밖을 내다본다. 승선한 배안에서의 생활 중에는 수시로 창밖을 내다보면서, 우리 배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여러 가지 사전에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일들인 날씨, 항해하는 타 선박 기타 안전상황 들에 대한 감지를 위해 눈길을 보내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이다.


마침 창밖으론 짙은 안개가 스멀스멀 배로 다가섰다가 옆으로 빠지는 장면이 마치 영화의 한 컷 마냥 연출되고 있다.

뿌옇게 빛바래진 선수 정박등 불빛이 그 안개의 지나침에 따라 보였다 숨었다를 반복하는데, 그 틈새에 언뜻 비치는 정박 중인 갑판의 모습을 내려 다 보려니까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흘러넘치는 광경이라, 절로 흐뭇한 미소가 입가에 띄워진다.


만약 저 안개를 항해 중에 만난 거라면, 피를 말리게끔 신경을 소모하며 보이지 않는 앞을 향해 소용없는 두 눈을 부릅뜨고 살펴야 하는 고된 당직에 녹초가 될 지경일 터인데, 이렇듯 조용한 항내에서 배가 움직이지도 않고 가만히 살필 수 있다는 것이 아예 행복 그 자체 인양 흐뭇하기만 한 것이다.


마음이 착 가라앉으며 평온해진 김에 집에 있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쓰는 일로 잠자기를 조금 더 뒤로 미루기로 한다. 오늘은 독에 찾아와 편하게 기다리고 있는 두 번째 날이 지나고 있는 것이다.


세성이 들 보아라 07월 12일

먼저 큰애의 11일 자 편지는 또다시 빈 파일만 날아왔다는 걸 알려준다.

대련항에 무사히 도착하여 좋은 기분으로 멜을 열면서, 편지가 먼저와 있다고 신이나 했는데, 막상 열고 보니 빈 파일의 편지라서 무척 실망도 컸단다. 어떻게 보내면 그렇게 되는지 잘 생각해둬서 이후에는 그런 일이 다시는 반복되지 않도록 부탁한다.


이곳 중국에 머무르게 되는 기간이 두 달이 넘어설 것 같은 예상이 나와서 너희 엄마는 좀 걱정스러운 눈치를 보였지만 나는 오히려 잘되었다(?)하는 심정이기도 하단다.


물론 너희들과 집안을 생각하면 너무 그럴 수만은 없는 거지만, 그래도 이런 경우가 너네 엄마 아빠의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 중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 하루 스물네 시간을 결코 떼어서 생활할 수 없는 그야말로 함께하는 시간으론 가장 긴 기간이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숙명적으로 떨어져 살아야 했던 배 타는 사람의 소외감을 일거에 해소시켜주려는 보상의 의미를 지닌 일인지도 모르잖니?

이 시간들을 너네 엄마 아빠는 우리 삶에서 소중한 추억거리와 즐거움으로 가득 찬 나날들로 만들어 내기로 작정하고 있단다.

그러기 위해서는 너희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가 필요한 것이란다.


그동안 할머니를 아빠와 엄마를 대신해서 아니 아빠 엄마가 하는 것 이상으로 잘 모시고 기쁘게 해드리며 집안에 웃음이 가득 찬 그런 나날로 만든 것은 너희들의 전폭적인 지지이고 협조라고 이야기해두고 싶구나. 너희들이 더욱 잘 해 줄 것이라고 믿고 있단다.

엊그제 항해 중일 때 마지막 핸드폰 통화에서 벌써 엄마가 빨리 돌아오기를 바라는 말을 하던 너희의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번 기회를 너희들도 엄마 아빠에 너무 의존하지 않는 자발적이고 자주적인 생활을 경험하는 좋은 기회로 만들어 주기를 또한 권해본다.


어제 입항해서 모든 입항 수속이 끝났지만 수리조선소에 들어가는 것은 내일이나 모레쯤이 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단다.


항내에서 보이는 주위의 섬이나 육지 모습이 마치 국내의 어떤 항구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로 우리나라의 모습과 별다른 점이 보이지 않는 흡사한 느낌이 드는 산야 풍경이 펼쳐지고 있단다.


처음 수속하러 우리 배에 온 그들 보트에 휘날리는 오성홍기를 보며 한번 섬뜩한 기분이 들었던 건 내가 아직도 너희와는 다른 세대임을 확인시켜준 일인 것 같다.


사실 그 깃발은 반세기 전쯤 우리와 총칼을 마주 대고 직접 싸우던 시절에도 휘날렸던 그런 기라는 걸 알고 있으니 용서는 할 수 있어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던가? 내가 살아있는 동안엔 영원히 잊지 못함이 남아있기 때문이겠지.

오늘은 여기까지. 대련항 외항에서 입거(*주 1)를 기다리며, 너희를 사랑하는 아빠가.


*주 1 : 입거 - 선박의 건조나 수리를 위해 Dry Dock에 올려놓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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