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결코 친 할 수 없는 최악의 기상상황
우리의 앞길에서 얼쩡거리던 열대성 저기압(T.D)들이 어젯밤 22시를 기해 열대성 폭풍(T.S)으로 한 등급 올라섰으니 그들은 이제 본격적인 태풍으로의 길을 가기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고 있는 셈이다.
앞에 것은 T.S RAMMASUN 이란 이름으로 그 시간에 북위 11.4도 동경 136도에 있으며 오른쪽 앞에 있던 녀석은 T.S CHATAAN이란 이름으로 북위 5.7도 동경 155.3도에 있는 걸로 나와있다.
그대로 항진을 계속한다면 마침 작년 7월 태풍 UTOR와 만났던 악몽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그 위치 부근에 도착하게 되어, 제대로 커진 태풍에 둘러 싸인 형태로 될 것 같은 초조한 예감이 괴롭히고 나선다.
현재의 상황으론 내일까지 계속 항진한 후 그때 가서 태풍을 피해 보려는 여부를 결정하기에는 태풍의 전방에 위치해가며 달려야 하는 거리가 너무 빠듯해 질 것이란 의구심이 점점 힘을 실어가며 앞장서기 시작한다.
그러니 태풍과의 안전거리를 넓히기 위해서는 아예 그들이 다 지나가도록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주거나 아니면 아주 빨리 달려서 태풍을 저 멀리 뒤로 보내는 방법밖에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작년 태풍과의 조우 사건도 태풍의 진로를 가로질러 앞서 지나치기는 했지만, 점점 절대거리가 짧아지는 과정에서 그 영향권에 끌려드는 위력을 감당하지 못하였기에 그대로 당했던 것이 아닌가?
그렇게 가로질러 앞서 나가는 방법으로 항해를 계속하라는 KS WEATHER의 추천을 다시 따르자니 뒤꽁무니에다 태풍의 움직임을 달고 도망쳐야 하는 형국이 아무래도 버겁기만 하다.
영향권에 들어서면 빨리 갈 수도 없는 상황으로 마음만 초조하게 시달리며 언제 맞을지 모르는 뒤통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서늘한 마음고생이 너무 할 것이란 지레짐작에 비록 며칠 간의 도착 시간이 늦어지더라도 대기했다가 안전하게 된 다음에 가는 것이 옳겠다는 판단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
14시. 최종적으로 결단을 내렸다. 배를 세워 태풍 CHATAAN을 먼저 앞세우고 뒤따라가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은 것이다.
기관을 정지하라 명하고 결과를 지켜보고 있던 브리지에서의 바깥 풍경은 구름은 많이 끼인 날씨지만 바람은 잦아지며 잔잔한 해면을 이루고 있어 태풍 피항이란 말이 민망할 지경이다.
단지 잔 너울의 여파가 한 번씩 달려와서 배를 횡요 시키기에 선수가 그 너울을 직각으로 타고 넘도록 타를 돌려보는 노력을 했지만 이미 전진 타력이 없어진 상태라 별 타효가 없어 저절로 그런 운동에 익숙해지도록 타를 'MIDSHIP'으로 위치시키며 DRIFTING을 계속하기로 한다.
미리 피항한 조용한 해상상태에서 하룻밤을 지낸 후의 새벽 다섯 시 브리지로 올라간다. 아직 동이 트기엔 이른 어둠 속 시간이라, 갑판상의 불은 모두 밝혀져 있고 거주구 외벽의 조명등도 켜진 가운데 배는 조용히 움직임을 멈춘 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태풍의 근황에 달라진 점은 없는가?
당직 중인 일항사에게 물으니 아직 새롭게 수신한 기상정보는 없고 잠시 후에 한 가지가 있다고 하며,
- 지금도 올라가는 배가 있는데요.
하며 우리도 올라갔으면 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어조로 레이더를 보더니.
-12.3 노트 밖에 안 되는 배인데요.
한다.
일항사의 보고를 받으며 이제 새로 나올 태풍예보를 참조하여 움직임 여부를 결정하리라 작정하고 브리지를 내려왔다.
아침 9시경 항로 추천 사인 KS WEATHER로부터 온 전문을 가지고 당직 중이던 3 항사가 보고하러 내 방을 찾아왔다.
전보 내용은 태풍의 예상 위치를 보태 놓은 전문에 아직도 DRIFTING 중이면 다시 항해를 시작하여 도카라 해협을 향해 최적의 속력으로 달리기를 시작하라며 만약에 계속 태풍 CHATAAN을 피하기 위해 기다린다면 5~6일 이상 기다려 서야 CLEAR 되어 항해 시작을 하게 될 거라는 코멘트까지 달린 전보이다.
그냥 버티고 있으려던 내가 예상했던 사흘이란 기간의 배가 넘는 날짜를 기다려야 한다는 게 버거운 상황으로 다가온다. 기관장과 숙의를 한 후 항해를 재개하기로 결정한다.
9시 30분. 북위 3도 12분 동경 143도 49분 위치에서 사흘을 겨냥하고 세웠던 배를 다시 움직이게 해 놓고 예상 상황을 체크하니 인정하긴 싫지만, 어제 그대로 항해를 계속했어도 괜찮았고 지금 움직이는 것보다 오히려 유리했을 거란 결론을 낼 수 있도록 사흘 후 6시경의 예상 위치가 아직도 650마일 이상 떨어져 있는 상황으로 그려주고 있다.
다시 항해를 재개한 마당이니 꼭 그런 예상대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는 마음을 가지고 브리지를 벗어난다.
태풍 피항 조치를 했던 결과가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 는 속담이 맞아떨어진 상황으로 되었지만, 태풍을 미리 피하기 위한 조처라는 명제로선 부끄러움이 없는 결정이었음을 우길 수 있을 만큼, 태풍은 결코 친 할 수 없는 최악의 기상상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