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해 중 적도나 날짜변경선을 지나게 되는 날이면 휴무를 하면서라도 적도제를 지내며 보내곤 한다. 삶의 터전인 바다를 살피고 선상의 주위도 둘러보며 심신의 피로까지도 풀어 보기를 하며 하루를 지내는 것이다.
어제는 지난 토요일부터 임시공휴일인 1일까지 포함해 쉼 없이 열심히 일해준 전 승조원에게 휴식을 취하게 하면서, 오후에는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적도제를 돼지머리를 놓고 지내기로 한 것이다.
대부분 가톨릭 신자인 필리핀 선원들도 동참한 적도제 행사는 돼지 머리를 놓기는 했지만, 절하는 사람들은 종교를 가지지 않았거나 본인이 원하는 사람들만 편하게 참여하도록 했고 행사 후 뒤풀이에는 모두 모이도록 한 것이다.
제를 지낸 후 돼지머리 고기를 썰어 놓고 모처럼 고사주를 골고루 음복하였다. 종교는 다르더라도 각자 바다를 관장하는 자신들이 믿고 있는 신께 승선 중인 본선의 안전항해를 기원하는 간절한 마음을 빌어보는 한자리 모임이다.
요 며칠간은 태풍에 모든 신경을 주고 있어 다른 생각할 여념이 없기도 하였지만, 그런 긴장의 끈을 느슨하게 만들어 보는 행사로 지내다 보니 이제는 집에서 오는 소식과 접하고픈 기대가 슬며시 들어서고 있다.
회사에 태풍에 대한 피항 관계 상황을 보고하려고 열어 본 이멜에서 오래간만에 아이들한테서 온 편지도 들어 있는 걸 보니 반갑다.
열심히 제 일을 하느라고 바빴던 것이 눈에 보이는 듯한데 막내가 휴가를 제대로 나올 수 있겠다는 것도 즐거운 소식이다.
우리나라에 여름철 불청객 태풍이 들이닥칠 것이라는 예보가 나오고 있는 모양인데 지금 우리가 경계하고 있는 녀석들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예상 진로를 살피니 황해로 빠져들어 중국의 동부 지방이나 우리나라의 서해안이 모두 그 영향권의 안에 들 것이란 예상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 태풍(RAMMASUN)은 우리 배에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았지만, 그 녀석과 비슷한 때에 좀 더 동쪽에서 생겨나서 약간 쳐져 있더니 지금은 우리의 오른쪽 뒤에서 슬금슬금 후속으로 올라가려는 녀석(CHATAAN)이 우리에게는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완전하게 발달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세력을 키우기 위해 꾸물거리고 있는 이때를 이용해 한 발짝이라도 더 멀리 태풍과 떨어져 앞서 달려가라는 항로를 추천받고 있다.
작년의 경험도 7월 2일이고 위치도 이곳 부근이라 그 악몽이 아직도 선연해 태풍의 앞쪽 진로를 가로질러 가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을 박으며 항로 추천을 다시 해달라고 하였지만, 오키나와 동쪽 바다를 오키나와의 북쪽을 통해 가는 항로가 아직도 유효하다고 알려 와서 아침 9시부터 그 지시에 맞춘 변침을 하면서 열심히 달리는 중이다.
집에서 온 소식에 TV 수상기 바꾼 것 이야기가 있어서 자세히 음미해본다. 당연히 있어야 할 부속품이 품절된 상황이라 제대로 수리할 수 없게 된 우리 집 TV를 제조회사인 S회사 측에서 20만 원이란 값을 쳐서 반납받는 형태로, 그들이 갖고 있던 진열품을 싸게 구매했다는 이야기에 무조건 잘했다고 맞장구 쳐준다.
그에 더하여 잘한 일은 지붕 위의 배수로 및 방수 공사인 것 같다. 이번 태풍의 내습 시 비가 제법 올 텐데 그때 진가를 발휘하리라 믿어 든든한 마음이 든다는 코멘트를 덧붙여 답장을 보내기로 한다.
국내의 커다란 뉴스로 우리 해군과 북한 해군이 서해에서 교전한 사실이 함께 전해저 왔다.
그 와중에 우리의 젊은이들이 전사하였다는 불행한 소식이 마음을 무겁게 한다.
해전이 발생하게 된 사단이 우리 어선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 때문에 생긴 일이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예전에는 나도 어선들이 경계선을 넘어 어로작업을 하는 사실을 이해해주던 편이었지만, 너무 어로작업에 깊이 빠져 경우를 무시하는 듯싶은 그들 어선들에 대해 괘씸한 마음 드는 상황 역시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렇긴 해도 그들 중엔 목숨을 걸어 놓고라도 좀 더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서는 어쩌다 보니 북방한계선을 넘게 되는 사람도 있다는 점 역시 사람들 사는 현실인 것이다.
아무리 봐도 억울한 상태로 산화하여 떨어진 꽃잎이 된 구국 영령에 대해 묵념을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은 가깝게 보면 예전 나도 근무했던 해군의 후배이기도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