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양에서 추월선을 만날 때마다 갖게 되는 심정.
항해 중 종종 만날 수 있는 추월 하여 앞질러 가는 배를 경험할 때마다, 늦은 속력의 본선이 새삼 야속해지는 심정에 빠져들기도 한다.
새벽 다섯 시 반이지만, 아직은 어둠만이 계속 머물고 있는 속을 멀리 뒤쪽에서 항해등과 현등만으로 나타났던 배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녹등이 점점 밝아지며 자신의 우현 쪽 옆면 씰루엣을 보여주면서 우리 배의 좌현에 바짝 달라붙듯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또 우리 배를 추월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제는 그래저래 만성이 되어 그러려니 해가고 있지만, 신조선이었던 오션 마스터호를 타다가 내린 후, 이 배에 처음 왔을 때는 지금과 비슷한 상황의 뒤로부터 나타난 배가 우리 배를 미끄러지듯 매끄럽게 추월하여 저만큼 앞서 나가는 모습으로 변하던 그때마다 가졌던 묘한 감정은 저속선에 승선한 야속함이었다.
L.J.H 씨. 현재는 우리 회사의 선장으로 근무하고 있지만, 두 배를 내 밑에서 일항사로 근무하였던 친구이다.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나와 같이 타던 오션 마스터에서 연가를 받아 하선한 후, 이 배 D/S호의 일항사로 근무하며 호주 항로의 바다 위에서 만난 적이 있었다. 내가 본선을 타기 전에 본선을 상대선으로 해서 가졌던 경험 이야기이다.
당시 나는 계속 오션 마스터호에 책임 선장으로 타고 있던 중인데, 그 때는 두 배 모두 호주에서 짐을 만선 하고 앞서거니 뒤서거니 우리나라를 향해 귀항하던 길이었던 것이다.
당직사관이던 일항사 한 테서 내 방으로 전화가 왔다.
-선장님, 대우 스피리트호 일항사가 선장 님과 통화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래? 그 배 지금 어디 있는데?
-우리 배 10 마일 앞에 있습니다.
-알았어, 올라가 보지. 그렇게 되어 브리지로 올라가 VHF 전화로 통화를 시도했다.
-대우 스피리트호, 여기는 오션 마스터호, 선장 J.H.T입니다.
-예, 안녕하십니까? 선장님! 대우 스피리트 일항사 L.J.H입니다.
하는 통화음이 대기하고 있었기에 총알 같은 응답으로 되돌아왔다.
그렇게 통화는 계속 이어졌는데 이야기 끝에 그 배에서 가장 힘든 게 속력이 안 나가는 일이라고 설명하는 음색이, 우리 배의 형편을 부러워하는 심정을 새삼 느끼게 하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서 당시의 내 형편에선 실감이 안 나니 별로 귀담아 생각질 않았었다. 그런데 이제 통화를 시작할 때 가물거리게 보이던 배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는 걸 볼 때쯤에는 상대선의 진짜 느려 터진 속력이 안타까웠던 것이다.
안전항해를 기원해준 후 <우리 먼저 갈게.> 하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겨주며, 상대방에게 좀은 우쭐한 기분마저 보여주며 헤어진 그때가 새삼스럽다.
그로부터 몇 년 후인 이 새벽. 이제는 그 배 대우 스피리트호에 승선하고 있는 내가 예전과는 반대의 입장을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 못 한 되풀이로 경험하고 있다.
단지 자금 우릴 따라내고 있는 선박이 일본 선사인 NYK의 배라는 점이 틀리고 서로 통화도 안 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때와 상이한 점이다.
지금 앞서고 있는 녀석은 PANAMAX BULKER인데 그렇게 뛰어나게 빠른 배도 아니건만, 현 침로로 봐서는 우리가 찾아가는 HAY POINT 쪽을 향함이 틀림없으니 어찌 짐을 먼저 싣기 위한 선착 경쟁선이 될 것 같다.
말하자면 입항 선착선이 되는 건데 그냥 이렇게 꼼지락거리는 식의 속력밖에 낼 수 없으니 어떠한 방어조치(?)도 생각 못한 채 그저 현실로 받아들이기만 하는 형편이 안타까운 스트레스로 남겨지고 있다.
틀림없이 저 녀석 때문에 선적 작업이 하루나 이틀 아니 그보다도 더 늦어지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벌써 들고 있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