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예전같지 않게된 이후에 새삼 깨달은 진리
새벽에 잠에서 깨어났지만 아직 기상해서 아침 일과를 진행하기에는 너무 이른 새벽 3시다. 그냥 자리에 누워 조금만 더 누었다가 일어나야지 작정하면서 문득 오늘 어떤 일을 처리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일을 오늘 중에 꼭 진행시켜야겠네! 하면서도 혹시 지금 잠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나면서 그 생각을 잊어버리지는 않을까? 하는 우려심이 들어 그냥 메모해둘까? 하는 생각도 했었지만 일어나 메모하기가 귀찮아, 설마 그걸 잊을까? 하는 내 스스로를 자만해보는 쪽을 택해 그냥 지나쳤다.
아침이 되었다. 식사까지 마친 후 일과를 시작하면서 새벽에 떠 올렸던 일이 상기되었으나 그 내용은 아무리 더듬어 봐도 어떤 일이었는지 도무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이리저리 기억을 훑어보았지만 도저히 알아낼 수 없으니 답답하다 못해 열까지 치받친다.
나중에는 침대에서 생각났던 일이니까 침대에 가서 누워서 생각해 볼까 하는 아이디어까지 실행했지만 그도 안 되어 일단은 초조한 마음을 접어 두고 잠시 몰두했던 생각에서 벗어나 쉬었다가 알아내 보자 하는 생각에 큰 쉼을 쉬어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생각에서 빠져나와 쉰다고 하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을 찾아내려는 노력으로 뒤죽박죽이다.
다시 한 가지씩 짚어가며 엉킨 실타래를 풀어가듯 계속 찾아가던 중, 아! 참 그런 생각이었지 하며 새벽의 생각이 퍼뜩 떠오르며 몇 시간 동안 고생했던 마음이 절로 누그러든다.
이번에 다시 잊어버리면 안 되겠지 하는 의지에 즉시 일기 수첩을 펴 들어 메모를 하였다.
선내 안전 비품 가운데 한 종류인 가스 측정기는 일 년간의 CALIBRATION 유효 기간을 갖고 있는 밀폐구역의 가스측정을 위한 기구로서 우리 배가 보유한 측정기는 12월 13일이 그 유효 기간이 끝나므로 미리 신청을 해 둬야 혹시 이번 삼천포 기항하며 받을 예정인 외부 감사에서 지적 사항에 걸리지 않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후에 열린 선내 안전 품질회의에서 수리 신청서 작성토록 지시하면서 이 일은 완결시켰다.
도착하여 투묘하기 두 당직 전만 하여도 바람이 휭휭 소리를 내고 파도도 높아 이대로 도착하여 안전한 투묘를 할 수 있을까? 은근한 의구심으로 조바심마저 가졌었는데 막상 도착하여 1636시에 투묘하고 나니 역시 육지 옆의 투묘지답게 바람도 많이 가려지고 파도도 그에 비례하여 낮은 상태이라 한 시름 놓겠다.
그러나 풍속계에 나타나는 바람의 순간 속력은 아직도 20 노트를 오르내리어 확인하는 내 마음에 께름칙한 앙금을 남게 해 준다. 항해 중에는 항해 중의 일들로 걱정을 하더니 이번에는 항구에 도착하여 투묘를 했건만 또 안전한 정박을 유지해야 한다는 걱정이 슬그머니 교대하듯 들어서려는 것이다.
그래도 무사 도착이라는 항해의 완성을 이뤄낸 기쁨을 만끽하며 당직사관들에게는 철저한 정박 당직에 임하도록 당직 중 이행할 사항을 야간지시록에 남겨 놓았다.
아! 이 못 말리는 좁쌀 할아범 같은 연속된 걱정으로 인한 스트레스는 예전에는 날씨가 조금만 나빠도 혹시 Mayday 같은 긴급한 연락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옷을 그대로 입고 소파에 누워 자는 둥 마는 둥 식의 수면을 취하며 날밤을 새운 적도 많았었다.
그러던 중 같이 승선하고 있던 고참 선배 기관장으로부터 자신은 그리 안 한다며 어차피 일이 생기면 그때 가서 빨리 처리하면 되는 것이지 미리부터 걱정한다고 안 날 사고가 나거나 날 사고가 안 나는 것은 아니지 않소? 하는 생활 속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는 나도 그렇게 하리라 작정하였기에 요사이는 황천을 만나도 잠을 잘 때는 겉옷은 다 벗고 자려고 시도하게 까지 되었다.
결국 그런 모든 일에 대한 너무 민감하게 갖는 마음가짐이 스스로에게 멍에를 지우는 스트레스인 것을 이제는 확실히 알았으니, 걱정이 된다면 그 걱정스러운 일이 안 생기게 하는 방안을 빨리 알아내고 실천하도록 다잡아가기로 한 것이다 - 단지 그런 결정이 너무 비상식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라고 타인들이 느끼게 해선 안 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