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다섯 시
공중 높이 떠 있는 반달(음력 21일)의 스산한 모습이 보인다. 마지막 어둠이 보이지 않는 끈으로 묶어 놓은 양 자유롭지 못한 느낌으로 바다 위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다.
그 빛의 일부가 어둠 속의 갑판을 걸어나가는 나를 짧은 그림자 만들어 어슴푸레하니 내 발걸음 앞에 드리워지게 하고 있다.
안개가 수평선과 육지의 해안선을 두리뭉실하게 품에 안아서 정박선이나 육지의 환한 불빛을 그냥 뿌연 그림자처럼 남겨주는 속을 힐끗 쳐다보는 것만으로 묘한 추위를 느끼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오늘따라 이때쯤이면 부근에서 보이던 어선도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만이 평소보다 커져 있어 보인다.
아마도 날씨가 다른 날 보다 좀 나빠져서 그런 모양이라고 지레짐작하며 더 이상 나빠지지 않기를 바라며 계속 선수 쪽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배의 중앙부 갑판에 도착할 즈음 선체 바깥쪽 바다 위에서 희끗거리는 작은 파도가 한 두 조각 눈에 들어선다. 외판을 스치고 지나치는 그런 파도가 내는 소리가 을씨년스러운 마음 위에 으스스한 추위마저 덧붙여 준다.
벌써 이곳에 닻을 박고 있은 지 어언 24일이 지나고 있다. 그에 따라 계절의 변화하는 감각도 달라져 오늘 새벽에는 싸늘한 냉기마저 느끼게 해주고 있다.
거기에 반팔 티셔츠를 입고 나선 운동이라 방금 잠자리에서 빠져나온 온기를 빼앗기며 읏쓸하니 몸을 움츠리게 된다. 되돌아설까? 슬며시 선수 쪽으로 나가기 싫어지는 마음이 들어섰다. 그러면 안되지, 생각을 다잡아가며 미련을 끊고 부지런히 발걸음에 힘을 넣어 앞쪽을 향해 나가기 시작한 거다.
그동안 선용품 소모를 줄이는 차원에서 꺼진 갑판 등의 전구를 갈아 끼우지 않고 버티고 있은 때문에 더욱 어둠이 가깝게 다가와 있는 SAFE WAY를 따라 조심스레 걷는다.
아직까지 버리지 못하고 쌓아둔(환경오염 문제로), 선창에서 쓸어 올린 철광석 찌꺼기가 그동안 몇 번 내렸던 비로 인해 쌓여 있던 형태가 둥그렇게 다듬어진 모습으로 변한 채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아무래도 펌프를 돌려 올려준 힘찬 물줄기로 청소를 하지 못한 갑판이라 발바닥에 쓸리는 철광석의 작은 조각이나 가루가 내딛는 발걸음을 반듯하고 산뜻하게 만들지 못하고 한 번씩 뒤틀리게 만들고 있다. 그냥 발 앞을 확인하며 계속 발걸음을 옮긴다.
선수에 가까워질 무렵 갑자기 앵카 체인이 꾸르릉!하는 소리를 내며 한번 튕겨 당기는 느낌을 온몸을 통해 전달시켜 준다.
풍압과 조류가 함께 힘을 모두어서 영향을 받게 해주니 뻗어나간 닻줄이 이리저리 휘둘리다가 방향이 바뀌게 되면서 순간적으로 튕겨주며 내 는 소리이다.
발걸음을 빨리하여 선수루로 올라선다. 앵카를 내리거나 올릴 때 일항사가 지휘하는 위치의 스텝 위로 올라가서 닻줄(앵카 체인)이 어느 쪽으로 나가 있는지 그 방향을 얼른 살펴본다.
흐려진 달빛과 선수의 밝지 못한 정박등이 비쳐주는 조명 때문일까? 선수의 BULBOUS BOW의 흐릿한 윤곽 너머로 방금 소리를 내어 신경을 끌게 했던 체인 이 시침을 뚝 뗀 채 거의 수직 상태를 유지하는 가장 작은 숫자의 몇 마디 체인만을 물 위로 보여주고 있다.
행여나 50도 이하의 각도를 이룬 채 앞쪽으로 쭉 뻗어서 여러 마디의 체인이 보일 거라 연상하며 내려다본 마음에 안도감이 들어선다.
이제 다시 뒤쪽을 향해 돌아서는 귓가로 저 앞쪽에 투묘하고 있는 작은 케미컬 탱커의 기관(발전기) 소리가 갑자기 들려온다. 방금 선수루의 불왁크를 돌아 나올 때 그에 막혀 있던 소리가 직접 전달되면서 크게 들리기 시작하는 모양이다.
힐끗 뒤를 돌아 곁눈질을 보내니 주황빛 알곤 등으로 환하게 선미 하우스를 밝히고 있는 그 배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다시 앞으로 고정시켜주며 발걸음을 계속 움직인다.
오늘은 오리걸음식으로 뱃살이 있는 부위를 많이 움직이겠다는 각오를 다지며 일부러 엉덩이를 양쪽으로 흔들어주어 뱃가죽이 뒤틀리게 하면서 걸었는데 확실히 뱃살에 영향을 주는 것 같다. 그곳의 근육에 기별이 가 있어 은근히 당기는 기분이 든다.
내일부터 계속 이 방식으로 걷게 되면, 아직까지 난공불락의 성 마냥 남아있던 내 X배도 결국은 줄어지리라 새로운 각오와 기대를 품어 본다.
아직 해가 뜨려면 한 시간 이상 남아 있는 어둠 속의 갑판을 이제 한 바퀴 돌았으니 예정한 바로는 아홉 바퀴가 더 남아있는 새벽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