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냔 아쉬운 인연
그동안 20여 일을 옆에서 닻을 내리고 이웃으로 지나던 컨테이너선 OOCL ATLANTA호가 낮 열두 시경 닻을 감기 시작하더니 제 갈 길로 떠나갔다.
두 번 씩이나 닻을 거두어 움직인 경력이 있어 이번에도 그렇게 움직이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지만 지난번 그 배와의 통화에서 20일 경이면 떠날 것이라 이야기했던 대로 떠나간 것이다.
벌커와 컨테이너선은 짐을 싣는 방법에서부터 운항 패턴이 아주 다르기에 항구에서 서로 마주치더라도 그냥 스쳐 지나는 그뿐일 터의 배들이지만, 갑자기 악화된 해운 시황으로 이곳 가오슝 외항에서 나란히 닻을 내리고 시황이 회복되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되면서 새롭게 동료 의식을 갖게 되어서였을까?
대기하고 있는 동안 알게 모르게 그 배를 보면서 동병상련의 안도감을 가져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바람이 좀 부는 날 강풍경보가 내려 있는 대만 해협의 기상도를 보며 은근히 닻이 끌리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주위를 살피다가 그 배로 눈길이 갔었는데,
그때가 밤이었고 환하게 켜진 그 배의 갑판상 불빛이 배의 난간을 지나 물 위에 매끈하게 반사시키는 모습에 파도가 별로 일고 있지 않는구나! 안심하였고,
또 한 번은 때가 낮이라 닻줄을 수직으로 내려뜨리고 있는 그 배의 늠름한 모습에서 조류나 풍압이 별로 세지가 않구나! 하는 안심되는 마음으로 강풍경보를 견뎌내기도 했었다. 그렇게 내 맘속에다 동료 의식을 심어주며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그 배가 열심히 닻을 감더니 어느새 스크루 포말을 하얗게 선미에서 뱉어 내면서 미끄러지듯이 저 앞쪽 뿌연 안갯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습을 열심히 쳐다보다가 회자정리(會者定離)의 씁쓰레한 인간사를 입안 가득 차 오르는 침으로 넘겨받았다. 그냥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그렇게나 든든한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떠나가는 모습을 보며 오래된 친구와 이별이라도 하는 것 같은 아쉬움에 다시금 촉촉하게 젖어드는 마음이다.
게다가 계속 지켜보는 내 모습이 안타까워서였을까? 하늘마저 수평선을 안갯속에 숨겨주어 어느새 그 배의 모습은 뿌옇게 흐려있는 안갯속으로 사라져 버린다. 방금 지나간 자리에다 희미한 스크루 회전류의 잔상만을 남겨준 채로….
다시 만날 기약은 아예 만들지도 않은 채, 20여 일간 같은 바다 위에서 나란히 머물렀던 인연은 그렇게 마무리되며 별리를 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