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들어간다는 것
귀국한 지 벌써 몇 날 며칠이 훌쩍 지나치고 있었건만 아직도 그토록 벼르고 있던 홍옥 혼(紅玉婚)을 기념할 여행을 실천 못하고 미적거리면서 결혼 40주년의 날이 들어 있는 저물어 가는 2월에 다가서고 있었다.
따로 할 일이 있었거나 걸림돌이 될 만한 뾰족한 이유가 있어서도 아니건만, 아무런 일 없이 흘러 보내려는 우리 부부의 결혼기념일을 모처럼 막내 남동생네 부부가 기억해주고 있었다. 차를 가지고 동해 쪽으로 함께 가족여행을 떠나자고 제안을 해 온 것이다.
그래 이런 방법도 있는 거야!
자신들도 은혼의 해를 맞아 같이 떠날 여행을 구상한 동생네의 뜻에 못 이기는 채 응하여, 어머니까지 모시고 나선 우리 부부의 홍옥 혼 여행은 그렇게 이루어지게 되었다.
일단 여행길에 들어서면서부터 차츰 즐거움으로 마음이 풀렸고, 두 아들 내외와 함께 길을 나서신 미수(米壽)의 어머니께서도 흡족하신 표정이시다.
그냥 동해 쪽으로 가기로 한 방향을 우선 영동고속도로로 바꿔 타기로 한다.
영주 부석사에 들렸다가 백암 온천을 거친 후 동해 쪽으로 가서 대게를 먹기로 합의를 한 것이다. 차는 규정된 쾌적의 속도를 내어 차들의 통항이 드문드문한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운전 봉사를(?) 하는 동생, 제수씨 그리고 어머니와 아내 마지막으로 나까지 합쳐진 다섯 명 중에 부석사가 처음인 사람은 나뿐이라는 이유로 여행의 코스를 그렇게 변경하여 잡아 준 것이다.
반평생을 훌쩍 넘어선 기간 내내 집을 떠난 마도로스 생활로 살아왔건만, 아직도 여행을 떠나며 가지는 내 천성은 새로움을 반기며 즐거워하는 흥분된 심정 안에 빠져듦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
지나치는 경치를 보고 감탄도 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일차 목적지인 영주 부석사에 도착한다.
아침 새벽 일찍 떠난 길이지만 중간의 휴게소에서 늦은 아침 식사를 한 상태라 그렇게 점심시간이 넘어 도착한 부석사이지만 아직까지 허기를 느낄 정도는 아니었다.
부석사를 먼저 관람하고 난 후 점심을 하기로 하고 매표소 앞에 섰다.
거기까지는 잘 걸어오신 어머니이시지만 아무래도 노령의 체력이시기에 가파른 길이 산재한 사찰 내로의 입장은 무리라 여겨졌다.
어머니의 기꺼운 양해를 구 한 후 동생은 다시 어머니를 주차장의 차 안으로 모시려고 뒤돌아서 내려갔고, 나는 아내와 제수씨와 함께 먼저 입장하기로 했다.
매표소 창 틀에 적힌 입장료를 보니 일인당 1,200원의 돈이 필요하다.
그런데 65세 이상은 경로 우대로 무료라는 내용도 적혀 있다.
-나도 조금 있으면 무료인데...
문득 아쉬운 어조로 동서와 나누는 아내의 대화를 듣게 된 매표소 창안의 직원이
-몇 년 생이신데요?
하고 말을 거들고 나섰다.
-44 년생인데요...
-아~ 그럼 그냥 들어가세요.
하며 방금 입장료로 받았던 돈 중에서 1,200원을 반환해주며 내주었던 표는 되돌려 받는다.
-예.. 고맙습니다.
아내는 웃는 얼굴로 그 호의를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리고 가만히 따져 보니 만 65세에서 7개월 반이 모자라고 있는 셈이었다.)
잠시 후 사찰 안으로 올라가는 길로 들어서면서도 아내는 방금 겪은 일의 결과가 흡족해서인지, 아이들 마냥 두 손가락을 활짝 펴 들어서 기쁨의 V자 그려주는 표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여보, 당신이 하는 행동이 무슨 뜻인 지나 알고 그러는 거예요?
이미 입장료를 면제받은 상태로 저만큼 앞장서 가던 내가 좀은 딱한 기분을 가지며 물었다.
-뭐 어때 서요. 경비 절감은 좋은 거 아니어요?
하며 우스개로 받아준다.
-그렇긴 하지만 그게 바로 당신 인생이 얼마 안 남았다는 뜻일 수도 있잖아요?
그렇게 이야기를 해도 아내는 예기치 않은 그런 대접받은 게 그저 즐거운 모양이다.
그때쯤이 되면서는 나도 아내의 기쁨에 덩달아 감염된 상태가 되기로 한다. 더하여 이런 즐거움을 갖게 해 준 부석사 매표소의 나이 듬직해 보이던 직원의 행동에 고마운 마음까지 보태게 되었고, 제수씨와 함께 걸으며 계속 즐거워하는 아내의 모습을 사진에 담으려는 포즈마저 취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세계 어느 나라에서 이런 아름다운 경로사상이 생활화되어 있는가? 하는 명제가 머릿속으로 들어서며 천왕문까지의 언덕길을 아주 수월하게 올라가게 만들었다.
나를 처음 맞이 해준 부석사는 이런 작은 해프닝으로 아주 즐거운 추억의 사진 한 장을 남겨 주게 했다.
부석사(浮石寺)의 전설을 지니고 있는 부석 바위를 배경으로 삼아 결혼 40주년의 날을 맞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