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리 호 손님방에서 첫날을 쉬다.
30도가 넘는 가파른 경사를 가진 현문 사다리를 힘겹게 올라선 선미부 현문에서, 조명은 어둡지만 굉장히 넓어 보이는 후부 갑판의 훤한 공간과 첫 대면을 하면서, 지금까지 두리 호를 향했던 선입견이 바뀌기 시작한다.
'꽤 괜찮은 배였구나!' 하는 심사가 드는 것이다.
여태까지 내가 타 왔던 CAPE SIZE 배 중에서 이만큼 훤칠해 보이는 넓은 후부 갑판을 가진 배는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처해 있는 상황이 이 배로서는 최악의 경우가 되겠지만, 그래도 넓어 보이는 Poop Deck의 첫인상은 그런 모든 악조건들을 물리치고도 남을 만큼 신선한 감각으로 나를 환영해 준 셈이다.
교대자가 되려고 한밤중에 찾아온 선장을 맞이해 주는 당직 선원들의 모습도 좀 검은빛이 약간 센 피부 빛이 아니라 우리네와 다르지 않은 미얀마 선원이라 그 역시 두리 호의 첫인상에 남 같지 않은 호감 도를 높여주는 일조를 하고 있다. (이건 일종의 인종 차별적인 인상론을 떠올려서 조심스럽지만, 그렇게도 인종차별의 의미를 부여하며 떠올렸던 생각은 결코 아니었고, 순간적으로 어둠 속에서 밝음을 원하는 감각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게다가 앞으로 한 달쯤 되는 짧은 기간이지만 승선하고 있을 동안은 그래도 즐거운 시간을 갖게 될 것이란 예감을 전임 선장을 만나면서 더욱 확신해 본다.
마침 내일 아침 정식 교대를 하면 내 방이 될 선장 실에서 반갑게 맞아주는 교대할 선장을 만나고 보니, 10여 년 전 나와 같은 배에 일항사로 타다가 승진하여 다른 배로 갔던 구면의 후배인 이 선장이다. 그 친구가 탔던 배라면 본선의 분위기를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지도 못했던 재회의 기쁨 속이라 대화의 감흥이 못내 따사롭다. 예전보다 더욱 원숙해지고 선장으로서도 틀이 잡힌 태도로 반갑게 맞이해주니, 선장 승진 발령을 받아 같이 타던 배를 떠났던 때가 바로 어제인 듯 반갑기만 하다.
어쩌다 나는 아는 사람일 거라는 생각은 전연 못한 채 왔었는데, 그는 이미 내 이름을 듣고 주위 사람에게 나를 알려주며 기다리고 있던 중이란다.
해운시황의 악화로 장기간의 투묘 대기와 힘들었던 운항으로 심신이 지쳐 있어 하선하겠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이번 4 월이면 결혼 20주년을 맞이하며 아내와 같이 지내고 싶어서 무리해서라도 내리려 했다는 하선 사유의 사족도 들려준다.
사실 나도 지난 2월에 결혼 40주년을 맞이하여 무언가 해보려는 마음에 회사가 원하는 승선을 미루고 있었지만, 이 선장 역시 이유까지도 나와 닮아있는 어쩔 수 없는 심성의 뱃사람이었던 것이다.
이쯤에서 반가운 해후의 옛이야기는 나중으로 돌리고 우선은 급히 필요한 사항에 대한 간략한 브리핑만 들은 후 아직은 손님으로 하룻밤을 쉬기 위해 배정해 놓은 파이로트 방으로 간다.
바쁘게 본선에 승선하려고 밖에서 기다리면서 이른 봄밤의 추위에 수월찮이 떨었던 몸이 피곤에 지쳤고, 시간도 어느새 자정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방에 들어와 혼자가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집에서는 듣지 못하고 있었던 선박 심장(발전기)이 뛰는 작은 진동음이 갑자기 침대를 통해 내 귀와 몸으로 들려온다. 새롭게 배에 승선하게 된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셈이다.
선원 아닌 사람이 배에 처음 승선하여 이런 진동이나 음색을 듣게 된다면 거의 모두가 단순한 소음으로 밖에 치부하지 않을 테지만, 오랜 승선 생활을 경험한 선원들은 들으면 들을수록 귀에 익은 정겨운 음색이 바로 배 안에서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각종 기기가 내는 기관음과 작은 진동인 것이다.
그건 당해 선박이 별 탈없이 잘 움직이는 살아있음을 나타내는 증거이기에, 만약 정박 중이거나 항해 중임을 막론하고 갑자기 선내가 조용해지는 경우는, 원하지 않는 큰 고장 등의 문제가 급하게 발생한 것을 알리는 위험상황인 것이다.
순간적이지만 갑자기 두리 호의 발전기가 내는 소리가 귓속을 파고들듯이 쏙 들려왔다는 의미는 언제나 그리워하고 사랑하면서 생활하였던 몸에 밴 승선 환경이 다시 나를 찾아와 주고 있다는 의미가 아닌가?
두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왼쪽은 선미부 마린 하우스 부, 오른쪽은 엔진룸 커버부로서 그 사이의 크로스 데크에 부식 크레인이 있다.